[KISTI과학향기]인류의 우유 소화 능력은 기근과 전염병을 통해 진화했다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파 설사를 하거나, 가스가 차 불편함을 겪는 사람이 많다. 이런 증상을 '유당(젖당) 불내증'이라고 한다. 우유에는 유당(젖당)이 들어있는데, 유당을 분해하려면 소장에 락테이스(lactase)라는 유당분해효소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갓난아기일 때는 락테이스가 생산돼 우유 속 유당을 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젖을 떼고 나면 많은 사람의 몸에서 락테이스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든다. 락테이스가 없어 소화되지 못한 유당은 대장 속 세균을 만나 발효된다. 그래서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프거나, 설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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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성인들이 우유 속 유당을 소화할 수 있는 효소를 생산할 수 없어 유당 불내증을 겪는다. (출처: shutterstock)

사실 유당 불내증은 전 세계 인구 3분의 2가 겪고 있을 정도로 매우 흔한 질환이다. 한국인의 경우 75%가 유당 불내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도면 오히려 우유를 잘 소화하는 사람들이 특이하다고 볼 수도 있다. 나머지 3분의 1에 해당하는 이 사람들의 경우, 락테이스 유전자의 활성을 조절하는 DNA에 돌연변이가 생겨 평생 락테이스를 생산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이 '락테이스 지속성', 혹은 '유당 내성'이라 불리는 유전 형질은 인종이나 지역별로 크게 다르다. 아시아와 남미에서는 유당 불내증인 사람이 더 흔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유당 내성인 사람이 더 많다. 특히 북유럽 사람들은 90% 이상이 유당 내성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유당 내성을 갖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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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유당 불내증을 겪고 있으며, 한국은 75%가 유당 불내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유럽인들의 대부분은 평생 유당 분해 효소가 생산돼 유당을 소화할 수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유당 내성에 대한 새로운 가설 등장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낙농업 발달과 유당 내성이 함께 진화해왔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우유와 유제품을 섭취하기 시작하면서, 우유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영양이나 건강, 생식 측면에서 큰 이점을 갖게 되고, 그만큼 더 잘 살아남아 유당 내성 유전자가 확산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공진화' 가설이라고 한다. 인류의 문화와 유전적 특성이 함께 진화해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인류가 유당 내성 형질을 갖게 된 이유로 새로운 가설이 제시돼 눈길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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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당 내성은 낙농업의 발달과 함께 진화한 것으로 생각돼 왔다. (출처: shutterstock)

영국 브리스톨대가 이끄는 국제 공동 연구팀은 먼저 고고학 유물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554곳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채취한 1만3181개 도자기 조각을 수집해, 여기서 얻은 유기 동물성 지방 잔류물을 분석했다. 고대 도자기에는 유지방 성분이 잘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분석 결과, 우유는 9000년 전부터 유럽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섭취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연구팀은 1700명 이상 고대 유럽인과 아시아인 DNA 염기서열 데이터를 사용해 유당 내성 유전자의 출현과 확산을 추적했다. 락테이스 활성을 높이는 이 유전자는 약 6650년 전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흥미롭게도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3000년 전까지도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즉, 유당 내성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사람들에게 확산했으며, 그 이전까지 수천년 동안 인간은 우유 소화 능력이 부족했음에도 우유를 마셔왔다는 것이다. 보통 유전적 변화가 확실하게 정착되려면 백만년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단 3000년 만에 유당 내성 형질이 선택돼 널리 퍼지는 것은 독특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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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000년부터 기원후 1,500년까지 유럽 지역에서의 우유 섭취 변화를 나타낸 그림. (출처: nature)

◇전염병과 기근이 인류의 유당 내성 진화 촉진

그렇다면 유럽인들이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유당 내성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연구팀은 전염병과 기근이 유당 내성을 빠르게 진화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건강한 성인이라면 유당 불내증이 있어도 설사와 불쾌함 정도로 그친다. 유당 불내증으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기근이나 전염병이 만연했던 고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농작이 실패했을 때, 유당 불내증인 사람의 유일한 대안이 우유나 유제품이었다면 상황이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설사로 탈수 증상까지 겹치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위생도 좋지 않았기에 병원체에 노출되기도 그만큼 쉬웠을 것이다. 연구팀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유당 불내증인 사람들이 죽을 가능성이 높았고, 유당 내성을 가진 사람만 살아남아 유당 내성 유전자가 짧은 시간 내에 확산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 연구팀이 모델링한 결과, 각종 병원체와 기근에 노출된 고대 인구에서 유당 내성 유전자가 확산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다만 이번 연구 결과처럼 유당 내성에 관한 연구는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압도적으로 많다. 앞서 말했듯 유당 불내증은 인종이나 지역에 따라 매우 다르게 진화해왔는데, 아직 이에 대한 연구가 다양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예를들어 몽골 대초원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유당 내성이 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낙농업과 우유 섭취가 발달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많지 않다. 이번 연구가 계기가 되어, 더 다양한 지역과 인류를 대상으로 한 진화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

글: 오혜진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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