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Image
주현 산업연구원장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가 소환되고 있다. 그는 세계사의 한 쪽을 장식한 펠로폰네소스전쟁이 페르시아 전쟁 이후 위상이 높아진 아테네에 대한 기존 패권국 스파르타의 두려움 때문에 발생했다고 해석했다. 이 해석이 주목받는 이유는 현재 미국과 중국 관계가 당시 스파르타와 아테네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국 견제는 점차 강력해지고 정교해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 거론되던 중국에 대한 위기의식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지나면서 무역 전쟁과 기술패권 경쟁 형태로 표출됐다. 배턴을 이어받은 조 바이든 행정부는 공급망 조사, 혁신경쟁법 추진 등을 통해 내부 전열을 가다듬는 한편 동맹국에 대(對)중국 견제 노선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면서 중국에 대한 경제 포위망을 좁혀 가고 있다.

일본은 확실히 미국과 같은 길, 같은 속도로 가고 있는 듯하다. 일본은 2010년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분쟁 시기 중국 희토류 수출 제한을 경험한 이후 대중국 경제안보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왔다. 지난 5월 참의원이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일본은 법적 근거를 가지고 첨단 전략산업 공급망 등을 안보 문제로 다룰 수 있게 됐다.

우리도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창립국가로 적극 참여하면서 미국과 방향을 맞춰 가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이 요구하는 속도를 따라가자니 곤혹스럽다. 미국 손도 중국 손도 놓을 수 없는 우리 산업·통상 구조 때문이다.

우리 반도체 산업이 세계적으로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미국의 묵인 없이 첨단 반도체 공정을 계속 선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으로 일본 반도체가 어떻게 침몰했는지 잊으면 안 된다. 반면에 중국이 장악하고 있는 리튬, 코발트 등 배터리 핵심 원자재의 공급이 막힌다면 우리 차세대 먹거리인 배터리 산업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산업은 글로벌 자유무역의 파도를 타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 효율적으로 국제분업 관계를 형성하며 성장해 왔다. 특히 중국과 연결된 산업 공급망은 다른 어떤 나라도 누리지 못한 우리 산업만의 경쟁우위 요소였다. 그러나 최근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는 첨단산업 안보화 흐름에서 중국과 광범위하게 연결된 우리 산업·무역 구조는 이제 공급망 리스크의 근원이 되고 있다. 우리만의 경제안보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2019년 일본 수출규제 이후 우리는 계속해서 공급망 충격을 경험하고 있다. 그 과정을 견뎌내면서 대응체계도 점차 고도화되고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촉발된 첨단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위기 및 공급망 충격은 민·관 총력 대응을 통해 빠르게 대처했다. 이 기간에 축적된 대응 경험과 소재·부품 수급대응지원센터 등 기반을 구축한 덕분에 지난해 있은 요소수 대란을 비교적 큰 탈 없이 헤쳐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미-중 패권 경쟁과 이로 인해 확산하고 있는 경제안보 이슈에 대해서는 장기 차원에서 종합 대응이 필요하다. 첨단기술을 둘러싼 미-중 간 경쟁은 일시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간 지속될 상수(常數)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안보는 1차 함수로 풀 수 없는 복잡한 난제지만 우리만의 경제안보 전략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공급망 이슈에서도 단기 대응을 넘어 경제안보적 요소를 고려한 전략이 요구된다. 우선 특정 국가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공급망 재구성을 통해 국민 생활과 경제 운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 담겨야 한다. 동시에 글로벌 산업 구조에서 우리 산업·기술·입지의 존재가 필요하도록 공급망 곳곳에 '린치핀'(Linchpin)을 박아 넣는 전략도 포함돼야 한다.

격변하는 국제 경제 환경에 개별 기업이 대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 기업에는 우리 정부의 개입과 지원이 필요하다. 정부가 혼자서 대응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경제안보 문제는 민간과 기업이 함께해야 최소한으로라도 대응할 수 있다. 민·관이 함께하는 우리만의 경제안보 전략으로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에 대응해 나가자.

주현 산업연구원장·GVC 재편대응 특별위원장 juhyeon@kie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