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를 단순히 연결만 한다고 기차가 되지 않는다.” 혁신의 아이콘인 조지프 슘페터가 했던 말이다. 기존 패러다임이나 전통을 뛰어넘는 창조적인 게 있어야 진정한 혁신을 이룬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이 미래 먹거리에 대한 고민과 탐구를 해온 지도 꽤 오래다. '신성장 동력' '전략산업' '첨단 신산업' 등 화려한 구호로 등장한 숱한 어젠다들도 눈에 띌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태평양 너머 미국 대통령은 이역만리 우리나라를 찾아 국내 대기업의 미국 공장 유치 약속을 받아내는 시대다. 그 대가로 젊은 회장과 단 둘이 기자들 앞에서 함께 회견을 하는 연출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반도에 진출해 있는 미국 자본이 리쇼어링(reshoring) 정책에 따라 본국으로 돌아가고 국내 자본마저 미국에 생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면 대한민국에는 뭐가 남을까. 산업 공동화 현상은 피하기 어려운 현실일 수도 있다.
슘페터는 이른바 '창조적 파괴'가 경제 발전 원동력이라고 했다. 대한민국도 낡은 것을 허물어 새로운 것의 움틈을 꾀하는 담대한 도전을 시도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대한민국 산업정책의 시작
모든 사물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면서 자기를 실현한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당연시했던 과거를 의심해 보고 불가능으로만 여겼던 미래를 신뢰할 때 기회의 문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우리 산업의 출발점을 돌이켜보자. 대한민국 산업정책의 시작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중화학공업의 육성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중화학공업을 우선순위로 선정하고 입지정책 중심으로 산업을 전개하였다. △산업단지, 특히 공장이 입지할 적합한 장소(location)를 찾아내고 △거기에 적합한 기업을 선정한 후 △토지를 저가로 공급하고 △취득세 등 감면을 통해 기업을 지원하는 단계를 밟았다. 포항에는 제철소를, 울산에는 자동차와 석유화학 공장을, 부산과 거제에는 조선소를 지은 것이 대표적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화시대로 전환하면서 영호남의 경제 수준이 역전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출 경제, 대기업 내지 재벌이 탄생하였고 지역 간 불균형, 도시화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도 발생했으나 산업화에 성공한 것은 인정받고 있다. 특히 정부가 주도하고 엘리트가 동원된 대한민국의 산업화 성과는 후발국들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문제는 과거의 중후장대형 장치산업과 굴뚝형 제조업 성공신화가 선진국으로 가는 우리의 미래를 더 이상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개척해야 할 4차 산업혁명 시대 전략 산업은 장치산업, 제조업과는 결을 확연히 달리한다. 그럼에도 미래산업을 과거 장치산업 프레임에 욱여넣다 보니 사업 추진 속도는 더디고 효율은 떨어진다.
우선 서울시를 보자. 현재 서울시와 서초구는 양재지역을 특구로 지정하고 AI융복합 산업거점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또 서울시와 강남구는 수서일대에 로봇클러스터를 조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구로동 및 가산동 일대 국가산업단지는 'G밸리'라는 스마트혁신도심산업단지로 재탄생했다. 용산전자상가 일대 또한 'Y밸리'로 옷을 갈아입으며 도시재생을 도모하는 중이다. 또 마곡일대 R&D 산업단지에는 M+센터, 홍릉(회기동) 일대엔 바이오허브 클러스터, 여의도에는 핀테크랩이 조성되는 등 서울 곳곳에 신기술에 기반한 미래산업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들 사업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정부나 지자체가 특정지역에 조성한 부지를 민간 기업에 제공하는 방식으로 추진된다는 사실이다. 취지는 수긍하지만 놓치는 부분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첨단 신산업은 아직 독자적인 건물을 소요할 만큼 규모의 경제를 구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시장의 구매력도 약한 편이다. 또 이들 신산업은 제조업과 달리 특정 공간에 고착될 필요가 없기에 이동 탄력성이 크다고 하겠다. 지금처럼 스타트업 등 첨단 기술 기업에 토지를 값싸게 분양하는 방식은 가물에 단비마냥 해당 산업에 경쟁력을 불어넣는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하고는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인력 공급이나 효율적인 공정 프로세스 제공 등 실질적인 육성 방안을 더 모색해야 한다는 말이다.
적합한 수단 못 찾는 정부
기업은 선택과 집중형의 지원을 목말라한다. 하지만 관료주의가 작동하는 정부와 지자체는 특혜 논란이나 공정성 시비를 우려해 몸을 사리기 일쑤다. 외국의 경우 비전을 갖춘 업체가 발굴되면 신속하고 탄력적인 지원 시스템을 가동한다. 기업 성장단계(기술 개발-시작품 제작-사업화-시장 진입-성장·성숙)에 따라 적재적소에 화력을 보태기도 하고 지원 금액이나 기간도 기업 잠재성과 역량에 따라 차등을 두는 등 다각도의 효율을 겨냥한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지원 기간도 대부분 1년으로 획일적이며 지원 금액도 기업별 차등을 두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원 사업 자체도 단발성에 그친다. 이래서는 기업이 연속적인 성장단계를 거칠 수 없다. 더욱이 기업은 성장단계별 각각의 사업에 제출하는 지원서 및 증빙 서류 준비에 녹초가 되곤 한다.
잘 나가는 기업을 더 키워서 유니콘기업으로 키우기보다는 다수의 스타트업이나 작은 기업을 공정하게 여럿 키우는 게 정부 역할이라는 소신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고민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과거 관행을 답습하는 사례도 많다. 전문용어로 경로의존(path dependence)이나 관성의 법칙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새로운 것 시도하다가 책임을 덮어쓰느니 기존의 안정된 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한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스타트업이 스타트만 하고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소멸하는 현실에 대한 변명이었음은 국내 창업 기업 폐업률 통계수치가 증명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창업 기업 생존율 현황' 자료에 따르면 국내 창업 기업의 5년차 생존율은 32.1%로 집계되며 장기화된 포스트코로나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OECD 주요국 평균 생존율인 44.1%에 크게 못 미치는 수치다.
서울의 마지막 대규모 산업단지, 마곡지구
서울의 마곡지구는 대단위 단지로 마지막 남은 금싸라기 땅이라는 각광을 받으며 출범했다. 서울시는 이곳을 R&D 산업단지로 지정하고 산업 용지를 분양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마곡산업단지는 계획을 입안하고 사업을 시행한 지도 이제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마곡지구에 산업단지나 R&D가 활성화됐다는 이야기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역시 과거 방식대로 산업단지를 분양하는 데에만 행정력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10여년 사업기간 동안 토지 분양률은 81.6%에 머물러 있다.
용지(토지) 분양률은 단지 분양 추이를 나타낼 뿐 그 위에 시설을 건축하였는지와는 별개 문제다. 분양 계약 이후 입주하거나 완공한 시점을 보면 60% 이상이 5년 가까이 소요되고 있다.
산업시설을 짓는데 5년이 걸린다? 건설 기간 치고는 과하게 장기간이다. 5년이 주는 의미를 음미해보면 의도를 추론해볼 수 있다. 토지를 분양받고 5년 동안 시설을 짓지 않으면 분양 해지를 당하게 된다. 최대한 버틸 때까지 버티다 해지를 당할 수는 없어서 건물을 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더 나아가 상당수가 당초 산업시설을 하겠다는 동기보다는 부동산 투자, 보험들기용으로 분양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정부는 이와 같은 부작용을 방지하고자 2015년 법률 개정을 통해 토지 면적을 1650㎡ 이하로 분할해 매각, 임대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이런 내막을 들여다보면 마곡 산업단지를 비롯해 미래산업 육성 차원에서 조성된 단지들이 해당 산업 발전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신산업을 제대로 육성하자면 실효성을 가지는 방향으로 정책을 리셋해야 한다. 제3공화국 시절 중화학공업 육성의 성공수단이라는 기존 패러다임을 벗어버리고 신기술에 부합하는 형식을 다시 만들어가야 할 시점인 것이다.
임성은 서울기술연구원장 ych5534@sit.re.kr
임성은 원장은 서울시립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행정고시 출제·선정 위원, 서울특별시 연구실장 등을 역임했다. 서경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국책연구원 평가위원를 거쳐 현재 서울기술연구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