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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헌 GIST 의생명공학과 교수.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2019년 NIH 연구비 주요 질병 비용 부담 비교세계 통증관리 치료제 시장 전망

얼마 전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암 투병 중이던 환자가 항암치료로 인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며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결국 죽음을 택했다고 한다. 이렇듯 항암치료나 그 외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는 중등도 이상의 통증은 일반 진통제로는 조절이 되지 않아 환자의 삶이 피폐해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런 때 환자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 사용이 불가피해진다.

◇만성통증이 일으키는 사회 문제

통증은 실제 또는 잠재적인 신체 손상을 피하기 위한 불쾌한 감각 또는 정서적 경험으로 생존에 필수적인 위험 경고 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외상이나 수술로 인한 통증처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급성통증과 달리 수개월 이상 지속되는 만성통증은 이제는 참아야 하는 증상이 아니라 질병으로, 적극적인 치료와 관리가 필요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일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2018년 국제질병분류(ICD-11)를 개정하면서 만성통증을 증상이 아닌 질병으로 구분한 바 있다. 통증 치료는 원인과 환자의 치료 반응에 따라 약물치료, 물리치료 등 보존적 치료와 각종 주사 요법 등 다양한 치료계획이 수립된다. 이 가운데 당뇨병성 신경병증, 대상포진 후 신경통, 항암치료로 인한 만성통증 등은 치료가 어려운 상태이다. 이런 난치성 통증에는 현재 항경련제와 항우울제 등을 복합 처방하고 있다. 그러나 효과는 실망스러울 때가 많으며, 결국 마약성 진통제까지 처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진통제 처방 규정이 완화되면서 오피오이드(아편에서 유래하거나 합성된 마약성 진통제) 사용이 늘어 마약성 진통제에 중독된 사람이 급증했다. 최근에는 마약성 진통제 오남용으로 인한 사망자가 자동차 사고와 총기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를 초과해 미국 보건복지부(HHS)는 대 국가적인 오피오이드 위기(Opioid crisis)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2018년부터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장기간의 중독을 끝내는 것을 돕는 'HEAL(Helping to End Addiction Long-term) 이니셔티브'를 발족, 만성통증 치료의 새로운 전략과 오피오이드를 대체할 신기술 지원을 시작했다. 2018년 1조2000억원 투자에도 암, 심장질환, 당뇨병을 합한 수와 맞먹을 정도로 유병률이 높은 만성통증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국가적 연구비 지원은 다른 질환에 비해 턱없이 낮은 상황이다.

국내의 경우 만성통증 환자가 전체 성인 인구의 약 10%인 250만명으로 추산된다. 특히 60세 이상 노년층에서는 절반 이상이 만성통증에 시달려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이다. 만성통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는 갈수록 증가해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나 아직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는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만성통증 치료 한계 및 융합 연구 필요성

현재도 진통제 등 통증 치료 약물 개발은 꾸준히 이뤄지고 있으나 수개월 이상 지속되는 만성통증에 약물적 치료는 제한적이다. 수술적 치료로도 증상 완화가 되지 않는 경우 마약성 진통제를 대신할 마땅한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비마약성 진통제 개발은 그 중요성에도 임상 성공률이 낮으며 원인치료보다는 증상 완화에 주로 머물러 있다. 이는 통증 신호전달 체계에서 고전적인 신경세포 중심의 접근법에서 개발된 치료제의 한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신경교세포 활성화가 통증 과민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이 밝혀지면서 비신경세포를 포함해 통합적인 관점에서 통증 기전을 규명하려는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신경교세포는 전기신호를 생성하지 않은 비신경세포로서 혈뇌장벽을 만들고 항상성을 유지하고(성상교세포), 면역 방어를 담당하며(미세아교세포), 수초를 형성하는(희소아교세포, 슈반세포) 등의 역할을 한다.

포뮬러 원(F1) 레이싱에 비유하면 최고의 기계를 극한으로 조정하는 드라이버는 신경세포이고 차량을 정비해서 최고 상태로 만드는 수리공은 신경교세포라 할 수 있다. 드라이버 혼자서 레이싱을 치를 수 없듯이 교세포 역할의 중요성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 또한 만성통증 상태에서는 신경세포뿐만 아니라 신경교세포 및 주변 미세혈관에서도 변성이 일어나고 있음이 발견되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말초 및 중추 신경계 수준에서의 통증 만성화 과정을 밝힘으로써 이제는 난치성이 아니라 기전 기반의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기초연구와 임상 현장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전방위적 융합연구는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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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 치료 시장 전망 및 융합 뇌과학 기술

시장 규모로 보면 통증 질환은 뇌 질환 중 압도적 1위(연간 600억달러 이상)이며, 현재 통증치료제는 항암제에 이어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판매된 약물군으로 알려져 있다. 급증하는 사회적 요구와 함께 세계 통증관리 치료제 시장은 꾸준한 증가추세로 2023년 771억달러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통증 조절 신약 개발의 성공률은 1상에서 미국식품의약국(FDA) 승인까지 약 2%로 매우 낮은 수준이기에 비약물적 치료법 등 새로운 치료제 개발이 요구되고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바이오전자 의료 분야에서 새로운 치료법을 모색하기 위한 SPARC(stimulating peripheral activity to relieve conditions) 프로그램에 2017년부터 7년간 2억4000만달러를 투자해 신경자극 관련 기술 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충족 치료 수요가 높은 신경계 질환의 혁신 기술로 신경 자극 의료기기에 투자하고 있다. 한편 통증 극복을 위한 정밀 신경조절 기술은 생체신호 측정 진단기기, 체외진단기기, 신경조절 자극 장치 등 다양한 시장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직 치료 반응성을 예측할 수 있는 바이오마커(통증의 존재, 진행 및 치료 반응을 보여 줄 수 있는 측정 가능한 지표), 정밀 뇌 신경조절 기술, 비신경세포 제어기술 부재로 기존치료제 부작용을 경감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이 요구된다.

국내에서도 2020년부터 4대 과기원 공동연구 프로젝트로 뇌과학자-공학자-임상가-기업이 참여하는 과학기술원 난치성통증연구단이 출범해 말초신경에서부터 척수 및 대뇌를 포함한 중추 신경계에서 신경세포-교세포 상호작용에 의한 통증 회로의 변성을 밝히고, 객관적인 통증 바이오마커 발굴 및 비약물적 정밀 신경조절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다. 이제는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고 있는 우리나라 산·학·연·병의 기반 기술과 융합 연구 역량을 결집하고 정부 주도의 전략적 투자가 결합한다면 세계 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달 예비타당성 평가가 통과돼 내년부터 과기부에서 10년간 4500억원이 투입되는 '뇌과학 선도융합기술 개발사업'은 기초연구에서 기술사업화로 연결되어 바로 활용 가능한 뇌과학 기술 확보에 마중물이 될 것이다.

◇만성통증 치료제, 고부가가치 품목으로

만성통증 환자는 일상생활에서 심각한 장애를 겪는다. 삶의 질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만성통증은 가정, 직장, 국가 단위로 막대한 비용 손실을 초래하고 있어 인류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난제이다. 학술·연구·의료·산업 분야의 다학제적 접근을 통해 혁신적 치료법을 갈망하는 거대한 통증 시장에 진입, 고부가가치 품목으로 경제적 효과도 창출할 날을 기대해 본다.

정의헌 광주과학기술원(GIST) 의생명공학과 교수 ogong50@gist.ac.kr

◇정의헌 교수는=한국과학기술원(KAIST) 졸업 후 미국 하버드대-매사추세츠공대(MIT) 융합 프로그램인 '헬스 사이언스 앤드 테크놀로지'(HST)에서 의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하버드대 의대(MGH)에서 연구한 뒤 광주과학기술원(GIST) 의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의생명공학, 뉴로포토닉스 및 중개의학 분야에서 성과를 창출해 왔다. 현재 4대 과기원 통합 과제인 난치성통증연구단 단장으로서 현 의학계의 난제인 통증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