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사태는 국제 무역질서에 현재 글로벌 공급망 체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 주는 계기가 됐다. 팬데믹으로 인한 각국의 봉쇄 조치는 반도체 공급 부족을 비롯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위기를 불러왔고, 우크라이나 사태로 촉발된 에너지 수급 불안은 지정학적 이슈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주며 수요와 공급에 대한 글로벌 무역질서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는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이 예정돼 있다.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달 26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노변담화를 비롯해 다양한 공개석상에서 “글로벌 공급망은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미국의 입장을 피력해 왔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글로벌 공급망을 과거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지정학적 요인과 국가안보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재편하겠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팬데믹은 글로벌 경기를 위축시켰고, 각국 정부는 경기부양·실업급여지급 등으로 팬데믹에 대응했다. 이렇게 유입된 막대한 자금은 시장의 자금유동성 증가와 수요 촉진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우리는 두 가지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됐다. 하나는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사태로 글로벌 공급 불안이 이어지며 수요와 공급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글로벌 공급망 위기는 대규모 유동성과 맞물려 원자재를 비롯한 각종 물류 비용의 증가를 부추겨 공급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인플레이션과 싸워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경기 부양으로 인한 보복 소비를 비롯한 급격한 수요 증가는 포스트 팬데믹 시대 글로벌 공급망 병목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며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것으로 보인다. 미국 공급자관리협회(ISM)에 따르면 미국 제조업체 공급망 지수(PMI)는 2020년 이후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확인되며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우리가 경험한 값싼 대량 생산 시대는 이제 서서히, 아니 급격한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와 다자간 무역체제에 기반해 형성된 현재의 국제 무역질서는 '자유무역 극대화가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킬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사태와 같은 지정학적 이슈는 단순히 특정 지역이나 산업을 넘어 '평화와 번영을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서 자유무역 체제의 역할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이 가져다 주는 경제적 혜택은 값싼 대량생산을 목표로 하는 다국적 기업뿐만 아니라 세계의 공장 역할을 자임해 온 개발도상국, 더 싼 가격에 높은 품질의 제품을 구매하고자 하는 소비자에게도 컸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체제 아래에서 자본 흐름이 자유로워지면서 노동과 인권, 탄소 배출과 같은 이슈를 등한시하며 생산 비용이 낮은 생산 거점을 쇼핑하듯 찾아 다니는 제도적 쇼핑(Institutional shopping)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공급망 위기는 값싼 대량생산과 공급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국가간 무역질서 재편을 요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대한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되는 키워드는 세 개다. 자국중심주의, 글로벌 공급망 블록화, ESG. 첫 번째와 두 번째 키워드가 경제적 관점의 구속적(Hard Law) 접근이라면 세 번째 키워드는 연성 규제 성격이 강한 비구속적(Soft Law) 접근이다. 자국중심주의는 국제 무역질서에서 예상 가능한 이슈다. 과거 자유무역을 통해 공동 번영을 추구했다면 이제 반도체 생산이나 에너지 수출에 안보를 고려한 자국우선주의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 편이 되라는 것이다. 향후 글로벌 공급망 블록화는 우리 정부와 기업에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한 선택을 강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어느 편 또는 진영에서 글로벌 무역에 참여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이익 계산을 떠나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기업의 입지를 정해야 하는 문제인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ESG가 있다. ESG는 규제는 아니지만 마치 규제와 같은 작용을 하는 연성 규제 성격을 띠고 있어 자칫 간과할 수 있다. 그러나 향후 추진되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ESG는 글로벌 공급망 편입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예를 들어 가격이 싸더라도 탄소를 많이 배출하고 생산한 제품이나 중간재 또는 원자재의 경우 관세를 부과하고, 심지어 노동과 인권 관련 이슈가 있는 경우 글로벌 공급망에서 아예 배제하겠다는 것이다.
기업의 전향적인 대응을 위한 정부정책이 필요하다. 지난 3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정부의 국정과제 110개를 발표했다. 다행히 발표된 국정과제에는 다수의 ESG 정책이 확인된다. 우선 산업부는 기업 성장과 환경적·사회적 성과를 연계하는 모델을 확산하는 방법으로 ESG를 지원하며, K-ESG 가이드라인을 고도화해 글로벌 공급망 실사와 대응해서 지원 사업을 새롭게 추진하는 것을 과제로 제시했다. 이에 더해 '소셜택소노미' 제도를 마련해 자칫 부족할 수 있는 사회(S) 측면을 강조한 것이 눈에 띈다.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는 ESG 금융 기반을 마련해 ESG 분야의 자금 지원 확대 계획을 분명히 했으며, 중소벤처기업부는 중소·벤처기업 대상의 ESG 맞춤형 컨설팅 지원을 통해 공급망 강화에 대비하도록 했다.
물론 이 정도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ESG를 특정해 정부 정책이 국정과제로 제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ESG 대응이 필요한 부문을 민관 전문가들이 구체적으로 검토해서 대응하기 위해 '지속가능성장위원회(가칭)' 설립을 검토한다고 밝힌 점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ESG 정책에 대한 정부의 노력이 기대된다.
필자 소개
김동수 소장은 2000년대부터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분야 전문 연구를 시작해 ESG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서울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2007년 한국생산성본부에 입사해 다우존스 지속가능경영지수(DJSI Korea) 개발을 주도했다. 이후 지속가능경영센터장 등을 역임했으며, 김앤장으로 자리를 옮겨 ESG 경영자문을 해오고 있다.
김동수 김앤장 ESG경영연구소 소장 dongsoo.kim@kimch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