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한국형 국경관리 장비의 세계화

Photo Image
임재현 관세청장
Photo Image

국내로 반입되는 해외직구 물품은 예외 없이 모두 세관의 엑스레이(X-Ray) 검사를 거친다. 베테랑 판독관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물건당 3초 남짓이다. 마약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경우 샘플링 막대를 꺼내 물품을 닦은 다음 '이온스캐너'에 집어넣는다. 마약과 폭발물 분자를 1억분의 1g까지 탐지할 수 있는 과학검색 장비의 화면이 붉어지며 양성반응을 보이면 포장 박스를 신속하게 개봉해서 검사를 진행한다. 적발된 불법 물질은 성분 분석기를 통해 메스암페타민(히로뽕), MDMA(엑스터시), 케타민(신종마약) 등 위험물질로 최종 판정된다.

이렇듯 직구 절차 곳곳에는 국경관리를 위한 과학기술이 보이지 않게 녹아 있다. 사실 관세청 직원 1명당 수입 물품 취급 규모는 1억990만달러로, 1인 업무량이 주요국 평균 대비 거의 두 배에 가깝다. 특히 최근 5년 동안 수입 물품 신고는 매년 300만건 증가해 2021년에 총 3900만여 건에 달했다. 단 하나의 수입 건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관세청은 일찌기 첨단 과학기술과 X-Ray 기기 등 장비를 도입해 왔다. 마약, 총기류를 비롯해 각종 유해 물질이 국경을 통과해서 전국 각지로 흩어지면 이를 일일이 추적해서 단속하기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관세청이 도입한 장비 대부분은 주로 총·칼 등 테러 수단으로부터 승객을 보호하기 위해 제작된 항공 보안 장비로, 비교적 형체가 뚜렷한 물품 적발에 최적화돼 있었다. 이에 따라 세관에서 주로 문제가 되는 가루 또는 액체 형태의 마약류, 불법 의약품과 같이 형태를 특정하기 어려운 물품 등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고도의 X-Ray 판독 노하우가 필요했다. 외산 장비에 의존하다 보니 우리 현실에 맞는 장비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어려웠다. 실례로 X-Ray 판독관을 위한 고가의 외국산 교육 프로그램은 학습자 수준에 맞는 난이도를 설정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무엇보다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는 밀수 수법, 최신 적발 사례 등에 대한 업데이트가 불가능하다 보니 교육 프로그램 구입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활용도가 떨어진다.

관세청은 시장에 출시된 상용 장비의 단순 구매에서 한발 나아가 국경관리에 필요한 기능을 탑재한 기술과 장비 개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2021년에 국가 R&D 사업을 시작했다. 2020년부터 과기정통부와 협업을 추진하는 한편 경찰청과 같이 우리보다 앞서 R&D를 시작한 부처를 벤치마킹하며 사업 준비에 들어갔다. 기획재정부와 협의해서 전담 부서(연구개발 장비팀)를 신설하고, 관세법에 근거 규정을 마련하고, 약 4년간 318억원 예산도 확보했다. 개청 50년을 맞은 관세청의 첫 국가연구개발 사업인 만큼 전국의 5300명 직원과 국민 대상의 현장 인터뷰 및 공모전을 거쳐 최종 5개 프로젝트를 선정했다.

2021년에 시작한 모든 프로젝트는 전국 공항만 현장에서 눈, 비, 먼지를 맞아 가며 365일 일하는 세관 직원들의 어려움 해소에 주안점을 뒀다. 현장 직원들의 성과가 곧 국민의 안전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주요 내용으로는 물품의 특성에 따라 X-Ray 에너지를 조절해서 숨겨진 위험 물품을 찾아낼 수 있는 국산 X-Ray 장비, 관세청 데이터를 활용하여 사용자 대상 수준별 교육이 가능한 X-Ray 판독 훈련 프로그램, 컨테이너 내 방사능 오염 물품의 위치를 3D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탐지 장비, 우범여행자와 화물을 동시에 추적하는 AI 기반 CCTV, 인체에 무해한 테라헤르츠파(㎔)로 신체에 은닉한 물품을 검색할 수 있는 신변 검사장비 등의 개발이다.

물론 미국, EU와 같은 선진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국경수호(Border Protection)라는 구호 아래 자체 R&D 조직을 설립하고 최첨단 기술을 결합한 국경관리 전용 장비를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관세청과 같이 해외에서 들어오는 모든 소형화물을 전량 X-Ray로 판독하고 화물정보와 연계해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찍이 데이터의 중요성을 깨닫고 미리 준비한 결과다.

특히 관세청 R&D의 가장 큰 특징은 전국의 5000여 세관 직원들이 연구자와 함께 개발하는 현장 프로세스에 있다. 작년 초부터 전국 공항만에 설치된 커스텀즈랩(실증 실험실)에서 모두가 애쓴 결과 짧은 기간에도 괄목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국내 최초로 X-Ray 핵심 부품까지 국산화에 성공했으며, 마스크를 착용한 여행자를 인식할 수 있는 AI 기술을 개발하며 미리 기획한 개발 스케줄에 맞게 순항하고 있다.

성과는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 덕분에 가능했다. 매년 열리는 대국민 관세행정 R&D 아이디어 공모전에는 QR코드 기반 세관신고서와 같은 현실적인 내용부터 메타버스를 이용한 가상세관 등 미래지향적 구상까지 보석 같은 아이디어가 많다. 앞으로 새롭게 시작할 프로젝트에도 국민 아이디어를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올해는 대국민 공모전을 확대 개최하고, 공항만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기관과 공동 협업 과제를 발굴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R&D 결과물이 세계로 진출할 기반 다지기에 신경을 쓸 생각이다. 이미 유니패스(한국형 전자 통관시스템)를 통해 한국 전자정부의 소프트파워를 경험한 많은 국가가 우리 R&D 소식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몇몇 EU 국가는 세부 과제의 개발 경과와 성과 공유를 요청했다. R&D 초기 단계부터 예비수요자인 해외기관들의 요구 사항을 수집해서 글로벌 국경관리 기관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신기술 장비도 개발해 나가겠다.

기술에는 국경이 없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느 공항에서 한국 관세청에서 개발한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실력을 배양한 세관 직원이 국산 X-Ray 장비를 활용해서 대량의 마약을 적발하고, 밀수범 일행까지 모두 추적해서 일망타진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을 날을 기대해 본다.

<필자> 임재현 관세청장은

서울 출신으로, 대일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경제학 석사 학위와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박사 학위를 받았다. 행시 34회로 공직에 입문해 법인세제, 소득세제, 재산세제 등 조세정책을 담당했다. 기획재정부 조세총괄정책관, 소득법인세정책관, 재산소비세정책관, 세제실장 등을 역임했다.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