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곡이 누렇게 익어 가는 1970년 9월 16일. 해너 미국국제개발처(USAID) 처장이 김학렬 경제부총리 초청으로 이날 오전 김포공항을 통해 내한했다. 해너 박사는 한국과학원 설립과 기술원조 지원의 최종 키를 쥔 인사였다. 해너 처장은 정근모 박사가 제안한 한국과학원 설립안을 한국에 보내 추진토록 했고, 이후 한국과학원 설립을 지원한 든든한 후원자였다.
해너 박사는 내한에 앞서 9월 14과 15일 이틀간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한국에 조사단 선발대로 왔던 정근모 박사도 국제회의에 참석해 그곳에서 해너 처장을 만났다. 정 박사가 밝힌 대화 내용. ◇해너 처장=한국과학원을 설립하는데 USAID의 지원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건의했나. ◇정 박사=조사단 의견은 450만달러입니다. ◇해너 처장=(잠시 생각에 잠긴 뒤) 아니야, 450만달러면 부족할 거야. 600만달러로 증액하게.
지원금을 더 늘리라는 해너 처장의 말에 정 박사는 깜짝 놀랐다. 해너 박사의 지시는 터만 보고서를 제출하기 3개월 전 일이었다. 그만큼 해너 박사는 한국과학원 설립을 적극 후원했다.
정근모 박사의 증언. “해너 처장은 한국과학원 설립을 적극 성원하고 지지했다. 해너 처장의 도움으로 나중에 한국과학원 설립 자금을 600만달러로 증액했다.”(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해너 처장은 방한 첫날 오후 경제기획원에서 김학렬 부총리와 만나 한·미 경제 전반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김학렬 부총리는 한국이 설립을 추진 중인 한국과학원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미국 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해너 처장은 이어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을 만나 한국과학원 설립을 위한 교육차관 건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해너 처장은 그 자리에서 차관 600만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이 약속은 한국에는 천군만마와 같은 원군이었다.
이틀 후인 9월 18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해너 처장을 접견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한국경제 발전에 USAID를 포함한 미국 측 지원으로 크게 힘입었다”고 치하했다. 해너 처장은 이에 “USAID는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 이 자리에는 김학렬 경제부총리와 포터 주한미국대사 등이 배석했다. 해너 처장은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내 고위인사들과 만나 양국 경제 협력에 관해 논의했다. 이런 가운데 9월 10일 미국으로 돌아간 터만 조사단은 최종 조사보고서 작성에 착수했다.
터만 단장은 처음 보고서 작성을 프랭클린 롱 교수에게 맡겼다. 그런데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롱 박사가 뉴욕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터만 단장은 이 일을 토마스 마틴 박사에게 의뢰했다. 이번에는 마틴 박사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의 연속이었다. 터만 단장은 보고서 작성을 이번에는 도날드 베네틱토 박사에게 맡겼다. 베테틱토 박사는 2개월여 작업 끝에 500쪽에 달하는 조사보고서 초안을 작성했다. 초안을 본 터만 단장은 분량이 너무 많다고 판단했다.
“초안 보고서 분량을 50쪽 내외로 줄여 주세요.” 터만 박사의 요청에 베네틱토 박사는 “그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터만 단장은 최종 보고서를 다시 작성키로 했다. 이 일을 담당할 사람은 조사단 중 정근모 박사 한 사람뿐이었다. 터만 박사가 정 박사에게 전화했다. “정 박사, 조사보고서 새 초안을 작성해 주게. 처음부터 자네에게 맡겨야 했지만 보고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다른 분들에게 의뢰했던 일이니 이해해 주게. 초고를 작성하면 내가 문장을 검토하겠네.”
정 박사는 그 무렵 뉴욕공대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하지만 터만 단장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과학원 설립은 그가 처음 제안한 일이고,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일이었다. 그가 제안했으니 마무리도 그의 몫이었다. “예, 제가 하겠습니다.”
정 박사는 조사보고서 제1장을 정리해 터만 단장에게 보냈다. 정 박사는 한국의 경제발전, 과학기술, 과학기술 교육, 해외 훈련 등에 관한 내용을 1장에 담았다. 일주일 뒤 터만 단장이 감수한 원고를 정 박사에게 보냈다. 보고서를 본 정 박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터만 단장이 보고서 이곳저곳을 온통 새빨갛게 수정했기 때문이다. 그때 터만 단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정 박사, 자네 원고를 많이 수정했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게. 글의 아이디어는 정 박사 것 그대로네. 나는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영어 문장만 고쳤네. 그러니 제2장을 작성해서 보내 주기 바라네.” 터만 박사의 격려에 자신감을 얻은 정 박사는 다시 보고서 작성에 집중했다. 이후부터 정 박사가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내면 터만 단장이 빨간 펜으로 수정해서 다시 보내는 일이 반복됐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마지막 결론 부분을 작성해서 원고를 보낸 정 박사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터만 단장이 수정해서 보낼 마지막 원고를 기다렸다. 며칠 후 수정본이 도착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수정본을 아무리 살펴봐도 빨간 펜으로 수정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이번에는 정 박사가 먼저 터만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사님, 제가 쓴 글에 고칠 곳이 있을 텐데 수정을 한 곳도 하지 않으셨더군요.” 이 말에 터만 박사는 크게 웃었다. “정 박사, 그게 아닐세. 자네 보고서를 모두 완벽한 영어 문장으로 작성하면 사람들은 이를 내가 썼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한국식 영어가 남아 있어야 자네가 썼다는 것을 알 게 아닌가. 결론 부분의 한국식 영어는 자네 서명이라고 할 수 있네. 그래서 초고대로 놔 두기로 했네.”
정 박사는 70세 노교수의 세심한 배려와 정직함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런 정직은 프린스턴대, MIT, 하버드대 등에서 만난 원로 교수의 공통점이었다. 후배와 제자의 연구나 논문 작성을 정성껏 지도하면서 그 논문이나 연구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런 자세는 학자의 기본 양심이었다. 이렇게 작성한 최종 보고서는 '한국과학원 설립에 관한 조사보고서'라는 제목으로 12월 USAID와 한국 정부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터만 단장 이름을 붙여 일명 '터만 보고서'로 불렸다.
최종 조사보고서는 7장으로 작성했다. △제1장 한국 경제발전과 공학 및 응용 과학교육(한국 경제발전, 한국 과학기술, 한국 과학기술교육, 해외 훈련) △제2장 한국과학원(과학원 설립과정과 개요, 자금조달, 실현가능성, 학생 자원, 졸업생 취업 전망, 독립기관으로 출범 이유) △제3장 조직 지침과 운영(이사회, 자문위원회, 원장, 교수진, 초기 교육분야, 교육과정, 교수 지침, 교수진 구성, 학위 논문, 전문 분야별 학생 정원, 학생 선발과 장학금, 실험기구, 도서관) △제4장 다른 과학기술 기관과의 관계(산업계와 학계, 연구기관, 해외기관) △제5장 재정과 외국 원조(해외 원조, 미국 자매교와 주미 한국과학원 조정관실 운영) △제6장 과학원 전망(석사과정 시간제 학생, 시간제 교육에 TV 사용) △제7장 자료편 등이다.
터만 단장은 보고서 마지막에 '장래의 꿈'이란 글을 실었다. 한국의 과학기술 강국 구현과 한국과학원의 발전을 바라는 기대와 염원을 담은 글이었다. “과학원은 2000년께 국제적인 역량을 가진 공과교육기관으로서 각국의 귀감이 될 것이다. 과학원은 교육계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는 첨병이 될 것이며, 과학원 졸업생은 한국 정부에서 지도적 역할을 할 것이다. 무엇보다 개발도상국에 희망을 주는 귀감이 될 것이다.”
정 박사는 한국과학원 조직을 다룬 부록을 작성해서 이듬해인 1971년 1월 5일 제출했다. 이 부록은 터만 박사의 감수를 거쳐 한국과학원 운영지침서 역할을 했다. 정부는 한국과학원 설립에 공헌한 터만 박사에게 1972년 12월 20일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