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빅딜'이라 불리던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영국 팹리스 ARM 인수가 최종 무산됐다. 규제당국이 독점 금지법을 이유로 인수합병(M&A) 승인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얽힌 주요 경쟁 기업 의사가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시장 독과점 규제와 국가 간 전략 산업 보호 명분으로 반도체 시장의 대형 M&A 성사 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8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ARM을 엔비디아에 660억달러(한화 79조원) 규모로 매각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EU) 등 주요국 규제 당국이 모두 반대 의사를 표시했고 엔비디아의 ARM 인수를 반대해 온 인텔, 삼성전자, AMD, 퀄컴 등 주요 기업 의사도 거래 무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ARM은 글로벌 모바일 칩 디자인 시장 점유율 90%를 차지한다. 세계 각국 기업에 합리적 가격으로 지식재산권(IP)을 제공하며 주도권을 확보했다. 그동안 각국 정부와 기업은 엔비디아와 ARM M&A를 허용하면 공급망 전체가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을 우려했다. 엔비디아가 IP 라이선싱 비용 결정을 가지게 되면 안정적 IP 공급을 제한받거나 라이선스료가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이번 M&A가 수포로 돌아가면서 ARM 대주주 소프트뱅크 그룹에 12억5000만달러(약 1조4800억원)를 위약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해당 금액은 ARM 인수를 공식화하면서 계약금 일부로 이미 전달했다.
반도체 업계의 대형 M&A 리스크는 한층 커졌다. 반도체가 국가 전략 산업으로 급부상하면서 규제 당국이 대규모 M&A를 가로막는 사례가 잇따르기 때문이다. 대부분 시장 독과점 우려를 명분으로 앞세운다. 앞서 중국계 사모펀드 와이즈로드캐피털에 매각하려던 매그나칩도 미국 외국인심의위원회(CFIUS) 반대로 무산됐다. 미국이 기술 유출을 우려한 결과다. 독일 정부도 대만 글로벌웨이퍼스의 독일 실트로닉스 인수를 막았다. 반도체 기업 인수에 국가 승인이라는 진입 장벽이 두터워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 사업부 인수에 성공했지만 M&A 승인을 위한 8개국 가운데 중국이 심사를 지연한 바 있다. 최종 승인까지 14개월 동안 미·중 무역 갈등으로 인한 M&A 불확실성이 지속 제기됐다.
삼성전자가 대규모 유보금을 활용, 반도체 기업을 인수할 것이란 전망도 사그라들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기업 등 여러 후보가 하마평에 올랐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M&A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2~3년 전만 하더라도 삼성전자의 반도체 기업 인수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지만 지금은 M&A 불확실성이 너무 커져 사실상 검토 대상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은 소프트뱅크가 차선책으로 기업공개(IPO)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FT는 업계 관계자를 인용해 소프트뱅크가 영국이 아닌 뉴욕거래소 상장을 추진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ARM은 8일 신임 CEO로 르네 하스를 선임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은 “ARM이 공모 시장 재진입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르네 하스 신임 CEO는 ARM 성장을 가속화할 수 있는 최적의 리더”라고 밝혔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