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나 발전기, 터빈처럼 로터(회전자)를 갖는 회전기계들은 보통 로터를 외부 환경으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케이지 등 프레임 안에 설치한다. 외부 영향으로부터 로터를 보호하고, 운동량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국내 연구진이 이러한 회전기계의 구조를 닮은 초소형 분자 로터를 합성했다.
김기문 기초과학연구원(IBS) 복잡계 자기조립 연구단장(포스텍 화학과 교수) 연구팀은 연구진이 자체 개발한 '포피린 박스'를 케이지로 사용하는 크기 2.3nm의 분자 로터를 합성했다. 머리카락 두께보다 10만 배가량 얇은 이 분자 로터는 외부의 화학적 자극에 의해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계'로도 불리는 분자 기계는 외부의 자극에 의해 기계적인 움직임을 구현해내는 분자 집합체다. 분자 기계를 최초로 설계하고 합성한 연구자들에게 2016년 노벨 화학상이 수여됐을 정도로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하지만 여전히 나노미터 수준의 영역에서 정밀하게 작동하는 분자 기계를 설계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다.
IBS 복잡계 자기조립 연구단은 2015년 6개의 사각형 포피린(P·porphyrin) 분자와 8개의 삼각형 분자(L)로 이뤄진 정육면체 모양의 다면체인 '포피린 박스(P6L9)'를 합성한 바 있다. 이 포피린 박스 내부에는 다른 분자를 삽입할 수 있다. 이번 연구에서는 포피린 박스 내부에 '축 분자'와 '회전체 분자'를 설치하여 분자 로터를 완성했다.
개발된 분자 로터는 외부의 자극이 없을 때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외부에서 화학적 자극을 가하면 회전체 분자가 축 분자를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는 회전(rotary) 운동과 축 분자 자체가 느리게 움직이는 텀블링(tumbling) 운동을 보인다. 화학적 자극 뿐 아니라 자외선 빛을 쪼여도 분자 로터의 움직임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다.
연구진은 포항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해 분자 로터의 정확한 구조를 분석하고, 핵자기공명법(NMR)을 통해 외부자극으로 분자 로터의 회전 및 텀블링 운동을 제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김기문 단장은 “본 연구에서 보여준 기계적 움직임을 잘 활용하면 외부자극에 의해 임의로 조절 가능한 분자 수준의 스마트 인공 기계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켐(Chem, IF 22.804) 1월 19일자(한국시간) 온라인 판에 게재됐다.
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