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발전하는 정보통신기술(ICT) 속도를 지금과 같은 포지티브 규제 환경 하에서는 금융이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점진 발전은 가능할지 몰라도 세계를 선도하는 핀테크 서비스를 만들어내기는 현 시점에서 분명 제한적입니다.”
권영탁 핀크 대표는 전자신문 주최로 열린 '정보통신 미래모임'에서 핀테크 비즈니스 현황과 전망을 점검하며 국내 시장 포지티브 규제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영탁 대표는 핀테크 업계에서 드물게 정보통신(IT) 분야와 금융 분야 양쪽에서 두루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1994년 SK텔레콤에 입사해 유통·판매·제휴·마케팅전략 등 다양한 업무 영역을 거쳤다.
2010년 말 하나SK카드에 합류해 모바일 페이먼트를 포함한 핀테크 영역을 담당했다. 이후 2016년 SK텔레콤과 하나금융그룹이 추진하는 조인트벤처 추진 단장을 맡았다. 양사 조인트벤처로 설립된 '핀크' 대표에 2019년 7월 취임한 후 핀크를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키워내기 위해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권 대표는 강연에서 국내 핀테크 규제 환경이 외국과 비교해 과도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간한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국가경쟁력 순위는 ICT 분야에서 2018년과 2019년 모두 1위를 차지했으나 금융시스템(FIN)에서는 각각 19위와 18위에 그쳤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KPMG가 선정한 2019년 세계 100대 핀테크 기업에도 미국 기업은 15개, 한국 기업은 불과 2개가 포함됐다.
미국은 '하면 안 되는 것'을 지정하는 '네거티브 규제'를 적용한다. 반면에 한국은 '해도 되는 것'만 정하는 '포지티브 규제' 방식이다. 빠른 기술 발전 속도로 인해 당장 내일 어떤 새로운 기술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포지티브 방식 규제는 핀테크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 권 대표 주장이다.
네거티브 규제 외에도 한국 금융시스템이 미국에 비해 뒤처지는 요인은 다양하다. 미국은 퍼블릭 데이터를 적극 공개하는 문화가 자리잡혔고 아웃소싱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
아이러니하게도 편리하고 저렴한 한국 금융 서비스 장점은 핀테크 발전에 오히려 방해 요인이 됐다. 은행 계좌 하나를 만드는 데도 고객이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미국은 핀테크 비즈니스가 전통 금융권 대비 경쟁력을 발휘하기 용이하다. 반면에 한국은 핀테크 서비스를 아무리 잘 만들어 내놓아도 기존 금융권 대비 뚜렷한 서비스 차이를 보여주기 어려운 환경이다.
현재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 갈등으로 국회 통과가 지연되고 있는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 사례도 대표적인 규제 장벽 중 하나다. 빅테크 기업의 금융거래 지급결제 관리 감독 권한을 두고 두 기관이 해법을 찾지 못한 까닭에 종합지급결제업을 준비하는 기업은 사업 준비에 난항을 겪고 있다.
권 대표는 “과거 IMF 사태에서 보듯 모든 금융 규제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규제 수준을 어디까지 할 것이냐는 측면에서는 금융당국과 시장의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금융권 '언번들링' 가속…ICT 플레이어들 약진
최근 금융권의 가장 큰 트렌드는 '언번들링(Unbundling)'으로 요약된다. 과거 라이선스 기반으로 금융회사만 가능하던 서비스들이 ICT 기반 비금융 회사들의 신규 진입으로 인해 주요 플레이어가 대체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시가총액 기준 미국 최대은행인 웰스파고 사례가 대표적이다. 웰스파고는 △대출 △결제 △송금 △보험 △투자 △펀딩 등 라이선스로 가능한 모든 금융 서비스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최근 결제는 '스퀘어'나 '스트라이프', 대출은 '랜딩클럽', 송금은 '아즈모' 등 각 분야 신규 진입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전통 금융을 바라보는 금융전문가들 시각도 이와 같다.
금융미래학자 브렛 킹은 “알리바바와 같은 ICT 기업이 세계에서 가장 큰 금융회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블랭크 페인 골드만삭스 회장 역시 “골드만삭스는 금융회사가 아닌 IT 회사”라고 했다.
ICT 기반 비금융사는 기술을 레버리지 삼아 금융 기술을 계속 공략해 나가고 있다. 핀테크 대두 이후 8~9단계에 달하던 송금 과정은 1~2단계로 단축됐고 높았던 해외 송금 수수료도 훨씬 낮아졌다.
비금융정보 기반으로 대출 고객 신용을 판단하는 대체신용평가 모델 역시 핀테크 발전으로 새로이 등장한 기법이다. 모바일 이해도가 높은 MZ세대(1980년부터 2004년생까지를 일컫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5년부터 2004년 출생자를 뜻하는 Z세대를 합쳐 일컫는 말) 소비자에 이르러서는 ICT 기업의 고객 공략 속도가 더 빨라질 것으로 분석된다.
권 대표는 “언번들링 단계에서는 금융 밸류체인에 혁신이 일어나고 거래 복잡성이 제거되기 시작한다”며 “현재 금융 서비스 변화는 언번들링에 그치지 않고 AI 기반 '인텔리전스 금융' 단계로 돌입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텔리전스 금융 단계에서는 금융 UX(사용자 경험)가 혁신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현재 대부분 금융 애플리케이션(앱)이 채택하고 있는 메뉴 중심 '트리 구조'는 일정 시점부터는 AI에 기반한 대화 구조로 진화한다.
또 금융이 바뀌면 이와 연계된 커머스 등 연계산업도 연쇄적으로 혁신될 수 있다. AI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고객 관심사를 분석해 필요한 금융이나 상품을 먼저 제안하는 '오퍼링(Offering) 커머스'가 일반화된다. 이는 은행 지점 대폭 축소, AI가 전문금융인(투자·심사·트레이더)을 대체하는 효과로 이어지며 장기적으로는 카드·저축은행 시장이 전면 재편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향후 금융시장 구도는 은행 간 경쟁, 보험사 간 경쟁이었던 시대와 달리 다원화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권 대표는 “핀테크 플레이어들은 '에지'를 살려 해당 영역에서만 잘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특화 영역을 기반으로 금융 기능을 다시 '리번들링'하게 될 것”이라며 “빅테크 기업은 금융업 시장잠식보다는 간편결제 등을 이용해 기존 고객 록인(Lock-in)에 중점을 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운영 과정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시 금융과 연계한 다른 영역으로 확장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오픈뱅킹과 마이데이터, 무선인터넷 망 개방만큼 충격”
2000년대 이동통신사가 무선인터넷망을 개방하면서 국내 ICT 업계는 큰 변혁을 맞았다. 통신사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혁신 콘텐츠를 제공하는 사업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네이버, 카카오 등이 등장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권 대표는 “2019년도 금융사의 금융결제망 개방은 이통사 무선인터넷망 개방 못지않은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한다”며 “오픈뱅킹으로 인해 ICT를 무기로 하는 새로운 핀테크 플랫폼들과 유니콘도 등장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금융결제망 개방으로 은행이 보유한 결제 기능과 고객 데이터는 오픈 API 시스템을 거쳐 제3자에게 공개할 수 있게 됐다. 기존 펌뱅킹 수수료는 기존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어 핀테크 기업의 비용부담과 진입장벽도 해소됐다.
무엇보다 오픈뱅킹이 도입되면서 고객 편의가 크게 증진됐다. 은행 앱 1개만 설치해도 다른 은행의 업무처리까지 가능해졌다.
마이데이터는 금융데이터 잠재 가치를 더 높여주는 사업이다. 미국이 산업별로 보유한 데이터를 분류해 보면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권에서 보유한 데이터가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앞으로 금융회사는 마이데이터 기반으로 고객에게 최적화된 금융 서비스를 만들어 제공해야 경쟁이 가능해진다. 서비스 혁신 무게중심이 금융회사에서 고객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마이데이터 사업으로 빅데이터 서비스는 활성화될 예정이다. 파편화된 금융 서비스를 통합 제공하고 일상 서비스와 자연스럽게 연계할 수 있게 된다. 전통 금융기관도 마이데이터 사업자와 협업해 '코어 비즈(Core Biz)'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
권 대표는 “다만 마이데이터가 고객들에게 서비스 가치를 느끼게 해 주려면 금융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만 갖고는 불가능하다”며 “인구 특성, 관계적 특성, 고객 성향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영역의 비금융 데이터간 융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핀크는 이런 마이데이터 서비스를 금융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게임을 최초로 접목한 '핀크리얼리'로 접근하고 있다. 관련 특허 출원까지 완료한 이 서비스는 고객이 재테크 고수를 비롯한 타인의 노하우가 담긴 실제 금융 데이터를 참고해 똑똑한 금융 습관을 형성하도록 돕기 위해 기획됐다.
다양한 연령, 직업과 연봉, 자산을 가진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예적금, 주식, 펀드 등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실제 금융상품 종류와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모아볼 수 있다. 이를 참고해 자신의 금융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 핀크리얼리 특징이다.
다른 이용자들과 금융 일상을 자발적으로 공유·교류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기 위해 SNS 방식을 도입했다. 이용자 참여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게임(챌린지) 요소를 접목했다.
서비스 참여 방법은 자산 정보를 연동한 후 원하는 챌린지를 선택하면 된다. 각각의 챌린지에서는 순위에 따라 최대 1000만원 당첨금을 즉시 획득할 수 있는 '리얼리워드 티켓'이 매일 1개씩 지급된다. 챌린지 종료 시점 순위에 따라 '배지'를 차등 지급할 예정으로 이를 수집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공개되는 모든 정보는 별명 기반으로 제공하므로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걱정 없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다.
권 대표는 “핀크리얼리는 출시 3개월 만에 누적 이용자 12만명을 넘기며 독창성과 가능성을 인정 받았다”며 “다이렉트 메시지 등 다양한 기능을 추가할 예정이며 하나은행 모바일 앱 '하나 원큐' 탑재 이후 다른 금융그룹들과 협상을 이어가며 제휴처를 늘려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형두기자 dud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