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지울 수 없는 상처이자 고통이다. 고색창연한 역사 문화를 자랑하던 프랑스는 나치 군사력에 무릎을 꿇었다. 프랑스 체면은 처참히 뭉개졌다. 독일 탱크는 프랑스 북동부의 작은 마을 수십 군데를 짓이겼다. 독일 군화가 밟고 간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귀족가문 출신 사를 드 골(Charles de Gaulle)은 전쟁이 발발하자 기갑 여단을 이끌고 전장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그는 일찌감치 독일의 재침공 가능성을 예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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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공격에 영국과 프랑스는 정신이 혼미했다. 이틈을 타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다급해진 폴 레노 프랑스 총리와 처칠 영국 수상은 영불 합병을 추진했다. 영국 정부는 동의했으나 패배주의에 젖은 프랑스 항복파가 반대했다. 합병은 물거품이 됐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는 이탈리아 배신에 치를 떨었으나 참전은 유보한 채, 연합국에 물적 지원만을 약속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다. 프랑스 원수(元帥)라 칭송받은 그는 폴 레노 총리 후임으로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태도를 바꿨다. 히틀러와 화친을 주장했다. 사실상 항복이었다. 페탱은 프랑스 공화정을 폐지한 후 남부 비시(Vichy)에 비시정부를 세웠다. 그는 비시가 프랑스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주장했다. 나치에 점령당한 북부를 포기하고 보장받은 대가였다. 페탱은 반(反)유대노선을 취했다. 나치 부역자 페탱에 분노한 드 골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드 골은 영국에서 프랑스 임시정부인 자유프랑스민족회의를 결성했다. 처칠은 드 골에게 독일 항전 방송을 하도록 허락했다. “우리는 전투에서 패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싸우자! 프랑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드골은 런던방송을 통해 프랑스인들의 결집을 호소했다. 영국에서 레지스탕스를 이끌던 드 골은 처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초기에 처칠은 드 골이 구성한 임시정부를 패전국의 일개 정치세력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처칠은 드 골이 좌파 성향이 있는 데다 '혼자 잘난 척'하는 인물이라 여겼다. 처칠은 프랑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드 골이 못마땅했다. 드 골은 자신이 프랑스를 구할 영웅이라 믿었고, 처칠은 그를 '메시아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이라 판단했다.

페탱의 비시 정부는 1940년 8월, 궐석재판을 열어 드 골의 계급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동시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 드골은 임시정부를 알제리로 옮겼다. 지하조직 활동을 독려하며 저항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1943년 8월 파리가 해방되자 드 골은 임시정부 수상에 취임했다. 그가 정권을 잡은 후 가장 먼저 실행한 조치는 나치부역자 처벌이었다. 자비는 없었다.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또다시 민족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페탱을 포함한 나치 부역자 6000여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특히 언론인, 정치인, 작가 등은 가중처벌을 받았다. 재판에 회부된 숫자만 12만명이 넘었다.

드 골의 애국심은 유별났다. “위대하지 못한 프랑스는 프랑스일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2차 세계대전 패배를 경험한 드 골은 다시는 전쟁에서 굴욕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치 부역자에 대한 철저한 처벌과 응징은 그런 다짐의 결과였으리라. 프랑스 구원의 짐을 진 '메시아 콤플렉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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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남서울대 겸임교수 ssonno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