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가 바다표범과 인간의 언어로 대화할 수 있고, 바다표범의 결혼생활을 물어본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바다표범 씨, 우선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로 말하자면 키는 2.2m, 몸무게는 300㎏의 참 볼만한 체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당당한 체구로 다른 수컷들과의 싸움에서 이겨 가장 모래가 곱고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제 구역을 차지할 수 있었죠.
-좋은 위치에 자기 구역을 만드는 게 아내를 많이 두는 데 도움이 되나요.
▲그거야 두말할 나위가 없죠. 인간들도 좋은 집, 좋은 차가 있으면 결혼 상대로 인기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바다표범도 마찬가지죠. 좋은 구역을 차지하기 위해 수컷들끼리 피 흘리며 싸우는 이유는 다 암컷들을 유혹하기 위해서랍니다. 저는 그 싸움의 승자였지요.
-부인이 8명이나 되는데 다 어떻게 만나셨는지? 부인이 많다 보면 문제도 많을 것 같습니다. 부부싸움도 남들 8배로 하게 되나요? 싫다고 떠난 부인이라든가.
▲험, 듣기 곤란한 소리군요. 전 암컷들 꽁무니를 쫓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할 필요가 없었지요. 해변에 구역을 정하고 나면 암컷들이 저한테 반해서 자발적으로 제 하렘(포유동물의 번식 집단 형태)에 들어오는 겁니다. 간혹 건방지게 말을 듣지 않거나 도망치려는 암컷도 있지요. 그러나 제 육중한 지느러미로 곤장을 맞거나 거대한 몸통에 눌리면 딴 생각을 못하지요. 이곳은 100% 저의 지배 하에 있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인간들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고 있어 바다표범 씨의 결혼생활에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저희 인간들은 키나 몸무게는 바다표범들에 한참 왜소하지만 몇 가지 잔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유전자 감식을 통해 친자 여부를 확인하는 건데요. 저희 인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친자 확인을 의뢰한 열 건 중 셋은 실제로 친자가 아니더라는 다소 충격적인 결과를 얻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완전해 보이는 결혼 관계도 속사정은 알 수 없다는.
▲아니 그럼, 내 자식들이 다른 수컷들의 자식일 수도 있다는 겁니까! 아니 이거야 원. 별소리를 다 듣겠군!
연구에 따르면 아기 바다표범의 3분의 1이 하렘의 왕인 수컷 바다표범의 자손이 아니었다. 암컷들은 어두운 밤, 안개가 짙은 밤, 그리고 때로는 낮에 물속에서 연인을 만나 사랑을 나눠왔던 것이다. 자신의 왕국이 완전무결하다는 건 수컷의 착각에 불과했다.
◇'정자 전쟁'을 벌이는 동물들
체구가 크고 힘이 좋은 능력 있는 수컷들이 꼭 자손을 많이 퍼트리는 것은 아니다. 바다표범뿐 아니라 다른 동물과 곤충들 사이에서도 힘없고 작은 수컷들이 자기 유전자를 퍼트리기 위해 갖은 방법과 노력을 기울인다.
몸집이 작은 연어 수컷들은 큰 수컷들이 교미를 할 때 주위를 빙빙 돌다 순식간에 사정을 하고 도망간다. 힘으로는 당할 방법이 없으니 도둑장가를 가는 것이다.
수컷 빈대들은 좀 더 엽기적인 일을 벌인다. 아프리카 빈대인 자일로카리스는 다른 수컷에게 정자를 사정한다. 일종의 동성 강간으로 보이는 이 행위의 목적 역시 번식에 있다. 다른 수컷에게 사정된 정자는 상대의 수정관 혹은 정관 속으로 이동해 살아 있다가 이 수컷이 암컷과 교미할 때 본인의 정자와 함께 암컷에게 전달된다. 다른 수컷들을 자신의 정자를 전달하는 배달부로 사용하는 것이다. 암컷과 직접 교미하지 않아도 자신의 자손이 태어날 수 있도록 말이다.
혼외성교를 막기 위한 동물들의 몸부림 역시 처절하다. 검은날개물잠자리와 난쟁이문어 그리고 일부 상어는 암컷과 교미하기 전 특수한 음경이나 촉수를 사용해 다른 수컷이 남긴 정액을 제거한 후 사정한다. 암컷이 여러 수컷과 교미할 경우 맨 마지막에 교미한 수컷의 정자가 수정에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다.
그래서 자신의 정자가 수정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잦은 교미를 시도하는 수컷도 있다. 일부 수컷은 교미 후 분비물을 이용해 다른 수컷의 접근을 막는 정조대 역할을 하는 교미마개를 만들기도 한다. 암컷들이 다른 수컷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노력들이다.
불륜, 패륜, 강간, 강제 낙태 등 어이없는 설정들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들. 사실 알고 보면 동물세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인간도 동물이니 당연하다고 웃어 넘기기엔 껄끄럽지만 말이다.
글: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