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소련과 군비경쟁으로, 사회복지 프로그램으로 경제 적자가 심각했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이 대통령 당선 당시, 그해 인플레이션율은 12%에 육박했다. 레이건은 집권 후 복지 예산과 소득세를 삭감했다. 각종 규제완화, 철폐 작업에 나섰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통화 공급을 대폭 줄이며 고금리정책을 펼쳤다.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다.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은 뉴스위크 기고를 통해 레이건을 두둔했다. “정부의 재정적자가 반드시 인플레를 유발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레이건의 감세정책은 잘한 일이다.” 프리드만은 신화폐수량설로 통화정책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복지감축, 시장 자율성 회복, 정부 개입 억제를 주장했다. 정부지출을 통해 불완전고용의 틈을 메우자는 공급경제학 주창자 케인즈와 반대되는 개념이었다. 레이건 경제정책은 진보 학자들의 빈축을 샀다. 심지어 공화당 후보 경쟁자 조지·부시는 허무맹랑한 주술경제라며 조롱했다.
재정적자는 줄지 않았다. 레이건은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묘수를 꺼냈다. 1985년 9월 22일.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플라자호텔에 다섯 나라 재무장관이 모였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이다. 플라자 회의에서 레이건은 달러를 매각하고 엔화를 매입한다는 합의서에 서명하라 압력을 넣었다. 서독과 일본의 화폐가치를 상승시켜 미국 수출 경쟁력을 회복하겠다는 작전이었다. 레이건의 표적은 일본이었다. 특히 일본을 무역적자 주범으로 지목해 환율을 문제 삼았다. 일본이 경제동물이란 소릴 들어가며 전 세계에 경제력을 과시하던 때였다.
레이건의 으름장은 이것이다. 첫째, GATT(관세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서 미국 탈퇴다. 관세를 없애 동맹국끼리 상호이익을 얻었던 거래 중단을 의미했다. 둘째, 달러 무제한 발행이다. 셋째, 미국의 전 세계 경찰국 역할 포기다. 소련에 대한 영국, 프랑스, 서독의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 없는 일본'에 일본이 겁을 먹었다. 네 나라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합의서에 서명했다. 좋게 말해서 묘수지, 사실상 '협박'이었다. 합의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일본 엔화가치가 상승하자 미국 제조업 경쟁력이 올라갔다.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한 레이건의 추진력은 살벌했다. 1981년 8월, 임금인상을 요구한 1만3000여명의 항공 관제사들이 파업을 결의했다. 미 공공노조에 속한 항공 관제사들은 규정상 파업이 불가했다. 규정을 어긴 이들에게 레이건은 초강수로 대응했다. 레이건은 48시간 이내 전원 직무 복귀할 것을 요청했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관세사들에 대해 파면은 물론 다신 복귀할 수 없도록 했다. 이에 놀란 1650명이 복귀했다. 돌아오지 않은 1만1350명이 해고됐다. 연방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했다. 정부는 항공관제사노조에 벌금을 부과했다. 노조는 파산했다.
레이거노믹스는 '불완전한 정책'이었다. 소득세 인하로 소비가 촉진되면 투자가 활발해지고 조세 수입이 늘어날 거란 예상과 달리, 재정적자는 쌓여만 갔다. 과도한 국방비 지출이 경제 불균형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거노믹스를 긍정평가한 학자들은 단순히 '경제성과' 측면에서 논할 일이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레이거노믹스는 국민 정신력의 부활이었다. 미국에 대한 긍지와 신념을 잃은 국민에 자신감을 불어넣고자 했던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의 출발이었다.
박선경 남서울대 겸임교수 ssonno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