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소비자단체vs의료계 찬반 팽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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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손의료보험 가입자가 3400명을 넘어섰지만 보험소비자 절반 가까이(47.5%)가 청구 신청을 하지 않는다. 병원에서 본인 확인 후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요청하고, 이를 다시 팩스나 우편으로 보험사에 보내야 하는 과정이 너무 번거롭기 때문이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보험소비자가 보험료 관련 자료를 병원에 요청하면, 의료기관이 직접 보험사에 서류를 전산으로 제공하는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를 추진하자는 논의가 수년 째 지속된다. 20대 국회에서도 이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논의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소비자 단체와 보험사, 보험소비자는 편익을 위해 반드시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의료계는 행정 부담과 데이터 유출, 악용 가능성을 이유로 강력 반대한다.

'국민 보험'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민 대부분이 가입한 실손의료보험 가입자 편의를 위해 병원이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는 가운데 데이터 악용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도 강화될 필요가 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수년째 제자리...올해도 폐기 가능성↑

보험가입자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실손의료보험 청구 자동화 논의는 수년째 이어오지만 번번이 의료계 반대로 무산됐다. 20대 국회에서도 지난해 9월과 올해 1월 고용진·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관련 내용이 담긴 보험업법 개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환자가 요청하면 병원이 의료비 증명 서류를 보험사에 의무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21일과 25일 국회 정무위원회는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었지만,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를 위한 보험업법 개정안을 논의하지 않았다.

사실상 20대 국회에서 통과는 어렵지 않겠냐는 전망도 제기된다. 정기국회 일정이 막바지에 접어든 데다 국회와 정부 모두 보험업법 개정에 의지가 약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국회는 막판까지 법 통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한다.

고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에서 논의가 안됐지만, 본회의 일정 전에 각 상임위에서 추가적인 법안을 논의하는 만큼 끝가지 최선을 다할 예정”이라면서 “국회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고 간사 간 협의가 안 될 수도 있어 (법 통과) 확답은 못한다”고 말했다.

◇간소화되면 청구 절차 절반으로 줄어..종이서류 사라진다

현재 실손의료보험료를 받기 위해서는 최대 5~6단계를 거쳐야 한다. 보험가입자가 병원비 수납 후 해당 병원에 보험료 청구를 위한 진단서 등 여러 서류 발급을 신청해야 한다. 본인 인증 과정을 거쳐 서류를 수령하면 보험금 청구서를 작성·접수한 후 수령한 진료기록 정보와 함께 대면이나 팩스·우편 등으로 제출해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청구할 의료비가 적을 경우 접수조차 하지 않거나 청구 과정이 귀찮아 보험료를 받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실제 한국갤럽조사연구소 설문조사에 따르면 실손의료보험 미청구자 73.3%는 진료금액이 소액인 것을 이유로 들었고, 병원 방문이 귀찮거나 증빙서류 보내기가 귀찮아서 청구하지 않은 비율도 각각 44%, 30.7%나 됐다.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가 되면 청구 단계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보험가입자는 병원에 청구에 필요한 서류 전송을 요청하고, 의료기관은 관련 자료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거쳐 보험사에 바로 전달하게 된다. 종이로 된 서류를 전산화하고, 병원-심평원-보험사로 연결된 전산망을 이용해 전달하면서 소비자 불편이 거의 사라진다.

◇의료계 빼고 다 '찬성'...“병원 동참해라”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는 실손보험 청구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 최근 금융위원회도 이 사안을 '신중 검토'에서 '동의'로 선회했다. 보험 업계와 소비자 단체도 청구 간소화에 찬성하면서 병원 참여를 요구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반대만 고수하는 의료계에 비판 목소리도 높다. 의료계가 주장하는 데이터 악용이나 유출 우려는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며 반박한다. 궁극적으로는 비급여 정보가 심평원이나 보험사에 흘러갈 경우 병원 경영 정보가 공개되는 데다 수가 산정에도 불리할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 청구 서류가 전자화된다고 해서 제공하는 데이터가 늘어나거나 유출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 아니다”면서 “심평원을 거쳐 정보가 보험사로 전달되기에 유출 가능성이 적고, 법적으로 가입제한 등 악용할 수도 없다. 오히려 종이 문서가 외부 유출이나 훼손, 분실 우려가 커서 전자화가 도움이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료 업계 관계자는 “의료계가 반대하는 명분은 데이터 악용이나 유출이라고 하지만 결국 보험료로 청구되는 금액은 비급여 정보를 의미한다”면서 “이 정보가 심평원과 보험사까지 흘러갈 경우 병원이 공개를 꺼렸던 경영정보가 공유되고 추후 정부와 수가 협상에서도 불리해지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의료계 “법적 강제할 이유 없어”...병원 부담만 가중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 여론이 우세하지만 의료계와 일부 환자단체는 여전히 결사반대하고 있다. 종이서류가 전산화되면서 데이터 유출과 악용 가능성이 커지고, 병원이 청구 업무까지 맡으면서 행정적 부담이 가중된다는 게 이유다. 실제 대한의사협회를 포함한 39개 의료 단체는 연이어 반대 성명을 발표,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전면적인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협 측은 “이 법안은 보험사 주장처럼 실손보험료 소액 청구를 쉽게 해서 국민 편의를 증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손보험 청구대행 강제화로 환자 진료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 실손보험 가입거부 차단 등 손해율을 낮추겠다는 의도”라면서 “의료계 우려와 반대에도 보험업계 이익만을 대변하고 국민을 속이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철회되지 않는다면 의료계는 총력을 모아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료계는 사보험 영역인 실손의료보험 청구를 왜 병원에서 강제로 도 맡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가가 책임지는 보험도 아니고 개인이 필요에 의해 선택한 보험인데, 정부가 나서서 청구 대행을 의무화하는 것은 문제라는 주장이다. 또 데이터 중개기관인 심평원을 두는 것 역시 해당 기관 역할을 넘어선 것이라고 비판한다.

한 수도권 대형병원 교수는 “개인적 계약에 기반한 사보험 청구를 일선 병원에 강제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여기에 따른 병원이 인센티브를 받는 것도 아닌데, 무조건 청구 대행업무를 맡는 것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심평원이 데이터 중개 역할을 하는 것은 자칫 데이터 검열이나 불필요한 데이터 수집 후 병원을 감시하는 역할도 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개별병원, 청구 자동화 서비스 도입 확산...내년도 본격화

의료계가 정부기관을 중개로 한 실손의료보험 청구 자동화를 강력 반대하지만, 일선병원은 자체적으로 자동화 서비스를 속속 도입 중이다. 병원 내 키오스크를 설치해 수납 후 바로 청구 서류를 팩스로 보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보험 가입자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병원이 제공한 전산화된 데이터를 보험사에 바로 전달하는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실제 삼성서울병원, 서울성모병원, 한림대성심병원, 이대목동병원, 건양대병원 등 대형병원은 의료IT기업, 보험사와 협업해 간소화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개발 중이다.

의료IT 업계 관계자는 “의료계가 반대하는 것과 달리 민간에서 제공하는 간소화 서비스는 병원에서 많은 관심을 보여 고객사가 빠르게 늘고 있다”면서 “결국 심평원에 비급여 정보를 준다는 것이 가장 큰 반대요인인데, 민간 기업은 시스템적으로 중개만 하기 때문에 부담을 덜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용철기자 jungyc@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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