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교근공(遠交近攻). 한국과 일본의 국가대표 축구대항전 한-일전을 이보다 잘 설명해 주는 말이 있을까. 최초의 한-일전은 광복으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54년 3월 7일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이었다. '지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출사표를 던진 우리 국가대표팀은 일본을 5대1로 꺾으며 6·25전쟁의 상흔에 신음하던 국민에게 큰 희망과 기쁨을 안겼다. 이후 한-일전은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숙명의 라이벌전 성격을 띠게 됐다. 국민의 열망과 선수들의 투혼은 역대 전적 41대14라는 놀라운 기록을 써 냈다.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로 시작된 또 하나의 한-일전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펼쳐졌다. '소부장 한-일전'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지난 8월 말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를 통해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 투자전략 및 혁신대책'을 마련했다. 우리나라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관련 연구개발(R&D) 위기 상황에 대한 성찰과 함께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대책엔 대외의존도가 높고 국산화·자립화가 시급한 분야의 신규 R&D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면제하는 내용이 담겼다. 기업과 관계 부처 간 협의를 거친다고는 하지만 급하게 추진된 기획으로 인해 자칫 예산이 낭비되지는 않을지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기술혁신본부에서 예타 면제 사업의 적정성을 검토해 최적의 사업비를 도출하고, 면밀한 분석을 통해 우선순위가 높은 핵심 품목 중심으로 재원을 투입한다면 걱정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이 축구 한-일전을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하듯 소부장 한-일전을 관심 있게 지켜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가 R&D가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그 목적이 국가경쟁력 강화를 통한 국민 행복 증진에 있음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국가 R&D를 통한 '노하우' 축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왜 국가R&D를 해야 하는지 '노와이(know-why)'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 눈높이에 맞는 R&D 전 주기의 혁신 방안을 제안한다.
첫째 신속한 기획과 선정이다. R&D 사업을 기획할 때 현장 수요를 신속하게 반영하고 응답해야 한다. 정책 지정(패스트트랙) 과제를 확대하고, 빠른 선정을 통해 적시에 R&D 과제가 추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도전성과 창의성 강한 R&D에 발 빠르게 투자하기 위해서는 '선진국 대비 기술 격차'와 같은 평가지표는 배제해야 한다. 급변하는 과학기술 환경에서는 세계 최고 또는 세계 최초를 지향해야 마땅하다.
둘째 유연한 평가와 관리다. 연구비나 사업 목표 등은 연구자가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하되 성과 중심으로 평가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연구자 중심 연구 환경을 조성하고, 창의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독창성이 뛰어난 R&D에 도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부정 방지를 위해 지나친 비용을 할애하기보다 일벌백계를 통해 자율성과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 자체 평가, 자체 감사, 상호 견제 등 유연한 평가 장치 마련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실용성 있는 성과 활용과 후속 조치다. R&D를 통해 핵심 원천 기술을 확보하는 동시에 시장과 현장 수요를 반영해 상용화를 추진해야 한다. 특히 기획 단계에서부터 산업계 수요를 반영해야 하며, 후속 연구를 통해 정부가 끝까지 책임을 지고 산업과 연결시키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까지 혁신 방안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있었다. 문제는 실천이다. R&D 컨트롤타워인 과기혁신본부를 중심으로 각 주체가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 정파 간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정책 결정과 민·관 협력이 절대 필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민·관이 공동으로 '소재·부품·장비 기술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핵심 품목에 대한 사업 추천권을 부여받은 것은 긍정 요인에 해당한다.
일회성 투자를 통한 단기 성과에 집중하지 않도록 확고한 방향성과 함께 긴 호흡으로 우리의 R&D 역량을 축적해 나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정부의 마중물 투자를 바탕으로 향후에는 여러 위기 상황에 대해 민간 주도의 선제 대응과 예방을 할 수 있는 R&D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김상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원장 sskim@kistep.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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