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가 100일을 지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 지형 변화도 본격화됐다.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경제 보복 차원에서 지난 7월 1일 시작된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분업 체계와 공급망을 흔들면서 새로운 판짜기를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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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화성 파운드리 공장 전경<사진=삼성전자>

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미국 듀폰사의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PR)를 양산에 적용하기 위해 테스트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EUV용 PR는 그동안 일본 회사가 100% 독점하던 소재다. 그러나 EUV용 PR가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 대상에 오르자 삼성전자는 듀폰 소재를 대안으로 검토하고 나섰다.

일본 소재업계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EUV용 PR를 공급하고 있는 A사는 한국 공장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 삼성의 구매 다변화 방침과 이에 따른 경쟁 구도 변화, 한-일 갈등의 장기화 공산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A사 고위 관계자는 “안정된 수급이 중요한 상황”이라면서 “올해 말까지 한국 생산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EUV용 PR, 불화수소, 불화폴리이미드 3개 소재에 대한 한국 수출을 까다롭게 하면서 부당한 규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당한 절차를 거치면 수출을 허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규제가 시행된 지 100일이 지난 현재 수출 허가는 총 7건(EUV PR 3건, 기체 불화수소 3건, 불화폴리이미드 1건)에 불과했다. 특히 액체 불화수소(불산액)는 아직 한 건도 승인나지 않았다. 언제, 어떤 품목이 한국으로 수출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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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반도체 생산라인 모습<사진=삼성전자>

이는 기업들로 하여금 안정된 공급 체계 구축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케 했다. 정치·지리적으로 영향을 가장 덜 받는, 리스크 최소화 방안을 새로 강구하게 했다. 공급망 재편에 불을 붙인 결정적 이유다.

불화수소는 공급망 변화 속도가 가장 빠르다. 그동안 일본 스텔라·모리타, 쇼와덴코가 장악한 불화수소는 솔브레인, 이엔에프테크놀로지, 램테크놀러지, SK머티리얼즈와 같은 국내 기업들이 대만·중국에서 대체재를 발굴하고 국산화에 나섰다. 불화수소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일부 교체가 시작됐고, 앞으로 더 많은 수입 대체가 이뤄질 예정으로 있다.

특히 반도체 핵심 소재의 공급망 재편은 해외 기업들의 한국 투자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짙어 주목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고 연구개발(R&D) 및 생산 거점을 한국에 두고 있어 안정적 공급과 판로 확보를 위해 한국에 진출하거나 거점을 두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실제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도쿄오카공업(TOK)은 인천 송도에 있는 한국 공장에서 EUV용 PR 생산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포토레지스트 업체인 B사도 일본에서 생산하던 EUV용 PR를 한국 공장으로 옮길 계획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반도체 소재 업체 관계자는 “수출 규제가 장기화되면 일본 업계도 자국 정부 눈치만 보고 있을 수 없다”면서 “판로가 끊기면 매출 손실이 불가피해 손 놓고 있다가는 벼랑 끝에 몰릴 것”이라고 전했다.

삼성전자는 일본 수출 규제 직후 일본산 소재, 부품, 장비를 전수 조사했다. 의존도 등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삼성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현재 비상 상황 발생에 대응하는 '사업지속성계획'(BCP)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도 의존도 높은 일본 제품에 대한 현황과 대체 가능성을 검토해 왔다. 안정된 공급망 구축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지속되면서도 대변화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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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 이천 캠퍼스 전경 <사진 = SK하이닉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