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인 미디어]2001:스페이스 오디세이 '할(HAL)과 데이지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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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데이지/내 청혼을 받아줘요/당신을 향한 사랑에/난 반쯤 미쳐가요/마차도 없는/소박한 결혼식이지만/자전거만으로도/우린 달콤할 거예요'

1892년 작곡된 '데이지 벨'이란 노래 후렴구다. '2인승 자전거'라는 부제가 붙는다. 아름다운 가사와 단순한 멜로디 덕분에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는다.

노래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건 1968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한 덕분이다.

2001년에 만들었다고 해도 어색할 게 없는 선구적 작품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화려한 영상미 이외에도 '할(HAL) 9000(이하 할)'이라는 인공지능(AI) 컴퓨터를 팬들 뇌리에 각인시켰다.

목성으로 향하는 우주선 디스커버리호는 할이 모든 기기 작동을 관장한다. AI가 고도로 발달한 할은 어느 순간 스스로 생각을 하게 되고, 급기야 비행사에게 반기를 들기에 이른다.

고장이 난 것 같다며 비행사가 할을 의심하자 할은 비행사를 감시하고 우주선 밖으로 내쫓으려 한다.

위기를 넘기고 우주선을 장악한 비행사는 할을 정지시키기로 하고 할의 모든 스위치를 하나하나 끄기 시작한다.

“멈춰요. 난 두려워요. 난 느낄 수 있어요.”

죽음을 느낀 할이 내뱉는 이런 대사는 으스스한 느낌마저 준다.

드디어 메모리를 초기화하고 진짜 작동이 정지되기 직전 할은 자신을 설계한 박사가 가르쳐준 노래 '데이지 벨'을 부르기 시작한다.

동요풍의 노래마저 잦아들고 할은 완전히 작동을 멈춘다.

할은 영화 사상 최악의 악당 13위에 뽑힐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AI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 장면에는 노래만큼이나 아름다운 일화가 있다.

사실 데이지 벨은 인류 역사에서 컴퓨터가 부른 최초의 노래다.

1961년 벨 연구소는 진공관을 사용한 컴퓨터 모델 'IBM 704'를 이용해 음성 합성 실험을 했는데, 이때 부른 노래가 데이지 벨이다.

SF 애니메이션에서 '삐리 삐리, 삐리 삐리'라는 식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컴퓨터 기계음은 바로 벨 연구소의 실험 결과를 따라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SF 작가 아서 클라크가 마침 벨 연구소를 방문해 IBM 704가 데이지 벨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이를 토대로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 작품을 썼다는 점이다.

아서 클라크는 이때의 흥분을 잊지 못하고 할에게 데이지 벨을 부르게 한 것이다. 그의 글 솜씨도 대단하지만 진공관 컴퓨터만 있던 시절에 AI 컴퓨터를 생각하다니 경이로운 상상력이다.

할(HAL)의 이름이 IBM의 알파벳을 한 글자씩 앞당겼다는 그럴싸한 해석까지 더해지면서 데이지 벨과 할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김용주 통신방송 전문기자 kyj@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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