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조정실은 게임장애와 관련된 현안과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개정 작업을 논의하기 위해 게임업계와 의료계 관계자가 참여한 민관협의체를 출범하고 첫 회의를 열었다.
목적이 화두로 떠오른다. 민관협의체가 게임장애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쏠리는 시선이다. 국내 도입을 위해 밟아나갈 단계를 논의할 것인지 아니면 국내 도입 타당성 자체를 원점부터 재검토할 것인지 방향성에 관한 관심이 증폭된다.
게임업계 인사들은 민관협의체가 게임장애를 질병 목록화하는 것에 답을 정해놓고 논의하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국내도입을 목적으로 도입·적용 단계만을 논의할 게 아니라 완전한 배제까지 포함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회적 갈등과 산업 가치 수호, 공중보건의료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질병분류 제11차 개정판(ICD-11)은 강제성이 없는 권고 수준이다. KCD가 반드시 ICD와 일치해야 할 필요도 없다. KCD가 ICD와 맞춰야 하는 것은 통계비교를 위한 체계부분에 불과하다. 세부 내용은 국가별로 달라질 수 있다. 국내 도입으로 말미암은 과도한 의료화, 진단기준 미비, 사회적 낙인 효과 등 여러가지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반면 의료계에서는 분명한 임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WHO가 제시한 새 기준에 맞춰 현황 조사와 증상 단계별 의료체계 구축 등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본다. WHO가 세계적 권위를 갖춘 집단이므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민관협의체를 주도하는 국무조정실은 게임 질병화 도입 자체를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하라고 주문한다. 정부는 WHO가 지난 5월 게임장애를 질병으로 분류한 직후부터 협의체를 준비했다. 먼저 보건복지부가 주도적으로 국내도입을 논의할 움직임을 취했다. 게임산업 위축 등을 이유로 문화체육관광부가 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며 부처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뒤 국무조정실 주도로 협의체를 출범하게 됐다.
당시 이낙연 총리는 “몇 년에 걸쳐 각계가 참여하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 건전한 게임이용 문화를 정착시키면서 게임산업을 발전시키는 지혜로운 해결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충분한 준비시간이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도입 여부와 시기, 방법 등에 대해 각계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기로 한 것이다.
질병분류 열쇠를 들고 있는 통계청도 같은 시각이다. 특정부처나 특정정책에 치우치지 않고 범용 통계를 작성할 수 있도록 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통계법에 따라 부여되는 개정·고시 권한이 고유 역할임을 공고히 하며 중립적으로 게임장애 질병분류를 처리하겠다는 뜻이다.
WHO 권고가 2022년 1월 발효된다. KCD 개정은 이르면 2025년에 가능하다. 시간은 충분하다. 통계청은 현재 초안을 작성하고 있다. 2023년까지 초안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하지만 ICD-11에 새롭게 추가된 질병이 많아 만약 통계청 초안이 2025년 이후 나오면 ICD-11은 2030년 개정되는 KCD-10부터 반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통계청은 초안 이후로도 의견 수렴 과정 등을 거쳐 조정안, 잠정안, 최종안 등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 방침은 기계적 중립과 게임산업 지속육성을 표방한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치려는 여론전이 확산되고 있다. 의료계와 게임계가 서로 유리한 고지에 서기 위해 내외부 결집을 통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의료계는 게임문제로 인한 환자와 주변 사람 고통을 줄여줘야 한다는 논리로 접근한다. 게임의 과도한 사용으로 말미암은 청소년 건강과 발달상 폐해를 지적한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실제 게임 때문에 고통 받는 환자와 보호자를 보살피고 게임산업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정확하게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전문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게임량이 다소 많다고 해서 다짜고짜 정신건강의학과에 자녀를 데려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학부모가 동네 한의원을 찾는 상황이 초래됐음을 상기시킨다. 초기 중독증상을 보일 때 정확하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증상이 더 악화될 수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의사회를 중심으로 각종 협회·단체 인사들이 모여 긴급 심포지엄을 열고 WHO 게임이용장애 도입을 지지한다고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복지부가 질병분류를 해야 한다는 강성 의견도 나왔다.
반면 게임업계는 게임장애 진단기준 모호함과 정신, 신경학적으로 정말 게임이용이 심대한 문제를 일으키는지에 집중한다. 지나친 의료화라는 논점으로 국내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삶의 많은 측면이 질병이나 질환과 같은 의학적 문제로 정의되고 치료되는 일련의 과정을 의학적 사회통제 확대로 보고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 게임장애 질병목록화를 통해 아이들에게 정신질환자라는 낙인을 찍는 것 말고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실질적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게임산업이 가진 문화 산업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도 지속하고 있다.
시민단체 장외 투쟁은 일찌감치 시작돼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여성·청소년·기독교·교육·학부모 계열 시민단체가 게임산업진흥을 담당하는 문체부 자세를 비난하며 게임장애 질병 분류 국내도입을 서두르라고 요구하고 있다.
게임계는 게임·영상·애니메이션·웹툰 등 디지털 문화 콘텐츠 90개 협회·단체가 모여 게임장애 국내 도입에 반대 목소리를 내며 충돌 중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해 건강한 갈등으로 승화시키는지가 사회 미래 발전의 핵심 요소”라며 “사회적 논쟁이 있는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하나의 사례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현수기자 hsoo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