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을 규제할 것이라는 현지 언론 보도가 나오자 국내 관련 업계는 잔뜩 긴장한 분위기다. 보도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면서도 규제가 현실화되면 피해가 불가피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규제 대상에 오른 3대 소재는 무엇?
산케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한국 수출을 규제하려는 소재는 반도체 제조과정에 필요한 '레지스트'와 '에칭 가스' 그리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다.
전문 용어인데다 각 매체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달라 규제 대상에 오른 품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배경으로 유추하면 산케이신문이 언급한 에칭가스는 불화수소를, 레지스트는 감광액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 풀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최근 국내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투명 폴리이미드(PI)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불산이라고도 불리는 불화수소는 반도체 웨이퍼 세척에 사용되는 소재다. 금이나 백금을 제외한 금속 대부분을 녹일 정도로 부식성이 강해 실리콘 웨이퍼 불순물 제거에 활용된다. 반도체용 고순도 불산을 공급하는 업체는 일본에 있다. 스텔라와 모리타다.
포토레지스트는 빛에 노출되면 화학적 성질이 변하는 물질로 반도체 제조공정 중 웨이퍼 위에 회로를 인쇄하는 노광(Photo) 공정에 사용된다. 웨이퍼 위에 균일하게 입혀진 감광액은 빛 반응에 따라 양성(positive) 또는 음성(negative)으로 분류된다. 양성 감광액은 현상공정을 통해 노광된 영역이 제거되고, 음성 감광액은 노광된 영역만 남게 돼 원하는 패턴을 그릴 수 있다.
투명 폴리이미드(PI)는 슈퍼엔지니어링플라스틱 일종이다. 열과 충격에 강해 폴더블 스마트폰 화면을 보호하는 커버윈도로 사용되고 있다.
◇3대 품목 수출 규제, 왜 민감한가
작년 11월 국내 반도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반도체 제조 핵심 소재인 불화수소(불산) 수입이 일본 당국에 의해 제동 걸린 것이다. 이는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다. 불산이 없으면 반도체 제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엔 또 불산 수급이 불안정한 상황이어서 더 걱정을 키웠다. 며칠 후 수출은 다시 재개되고 지금도 국내 반도체 공장은 중단 없이 가동되고 있지만 불산 위력을 실감할 수 있던 사례였다.
반도체용 불산은 일본 스텔라와 모리타 두 곳이 국내 수요 대부분을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반도체 소재 업체인 솔브레인이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일본에서 수출이 중단되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공장을 멈춰야 할 정도다.
포토레지스트도 마찬가지다.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반도체용 레지스트는 세계 전체 생산량 90%를 일본이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투명 PI는 아직 사용처가 많은 소재는 아니다. 삼성전자가 개발한 갤럭시 폴드 커버윈도(디스플레이 보호 소재)로 스미토모화학 투명 PI가 적용된 정도다.
그러나 갤럭시 폴드는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시장 정체 돌파를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세계 최초 양산형 폴더블 스마트폰이다.
만약 투명 PI가 스미토모에서 공급되지 않는다면 삼성은 대체 소재를 찾아야 하고, 이 경우 갤럭시 폴드 출시를 다시 늦춰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일본 '보복카드' 현실화될까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을 규제할 것이라는 보도가 전해지자 업계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진위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면서도 파장이 큰 사안인 만큼 전개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대기업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실제 일본 정부가 발표한 것이 아니라서 예의주시하는 상황”이라며 “판매를 금지한다는 게 아니라 승인을 새롭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파장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산케이신문 보도에서 언급된 소재들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중요도가 높은 것이다. 제조업은 소재 하나만 빠져도 전체 공정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의 압박이 커질 경우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체로서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일본 수출 규제 본격화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 반도체 산업을 멈출 정도로 워낙 파장이 커서다.
한 반도체 소재 업체 관계자는 “허가신청 및 승인에 90일이 걸린다는 일본 보도가 있는데, 90일이면 현재 소재 재고가 모두 소진될 수 있는 시간”이라면서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 공장을 멈추게 해 세계 IT시장을 혼란에 빠트리는 최악 상황을 직접 만들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도 “일본 언론 보도가 사실이라면 매우 심각한 이슈”라면서 “일본이 절대로 그렇게 할 리는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산케이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강제 징용 피해자 판결에 대한 보복 성격에서 수출 규제를 검토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한국대법원이 작년 10월부터 징용 피해자들이 배치됐던 일본제철(구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위자료 지급을 명령하는 판결을 잇달아 내리자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국제법 위반 상태가 됐다며 한국 정부에 이를 시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 징용 배상판결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한일 양국 기업의 자발적 출연으로 재원을 조성해 위자료를 주자고 한 최근 제안에 대해선 한국의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는 대책이 못 된다는 이유로 거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8~29일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간 회담은 불발됐다.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