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1629만 가구를 대상으로 여름철에 월평균 1만원가량 전기요금을 깎아주려던 정부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한국전력 이사회는 매년 3000억원 가까운 손실을 떠안을 수 없다고 판단, 요금제 약관 변경을 보류했다.
이에 한전 이사회는 정부에 재원 분담 비율(%)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처럼 한전 손실 보전도 상시화가 가능하도록 법·제도로 마련해야 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전 고위 관계자는 23일 “이사회 요구는 누진제 개편으로 인한 손실 보전을 정부가 제도로 담보해 달라는 것”이라며 “추후 정권이 바뀌거나 한전 경영진이 바뀐 후에도 손실 보전이 지속되려면 법제화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민관합동 누진제 TF가 한전에 전달한 최종 권고안은 7·8월 누진 구간을 확대해 1629만 가구 전기요금을 월평균 1만142원 가량 낮추고, 이를 상시화하는 것이다. 이로 인한 한전 부담액은 연 3000억원 안팎이다. 한전 소액주주들은 “이사회가 누진제 개편안을 수용하면 경영진을 배임 혐의로 고발할 것”이라고 누차 경고했다.
21일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열린 이사회에서는 로펌 2곳을 통해 확인한 경영진 배임 혐의 검토결과도 공개됐다. 한전 이사회가 누진제 개편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회에 참석한 한전 고위 관계자는 “이사회에서 로펌을 통해 확인한 경영진 배임 가능성에 대한 법률 검토 결과를 공유했다”면서 “경영진 배임 여부 등 여러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전했다.
이사회가 의결을 보류한 것은 한전 손실 부담과 경영진 배임 혐의 등을 두루 감안한 결과다. 추후 가결하더라도 구두가 아닌 제도로서 법적 구속력 있는 정부 지원 약속을 받겠다는 확고한 의지다. '한 번 속지 두 번 안 속는다'는 불신감도 내재됐다는 해석이다. 한전은 지난해 정부를 믿고 7·8월 전기요금을 감면하면서 3587억원 손실을 봤지만, 정부는 결국 353억원만 보전해줬다.
법조계는 한전 이사회가 요금제 약관 변경을 가결할 경우 배임 혐의가 성립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경영진이 의무를 위반해 회사 재산상 손해를 끼치거나 끼칠 위험이 있으면 배임이 인정될 수 있다는 것으로, 추후 이사회 회의록이 공개되면 찬성표를 던진 이사는 개인적으로도 부담이 클 거라는 예상이다.
구민회 법률사무소 이이(EE·怡怡) 변호사는 “한전 경영진이 요금제 약관 변경을 가결할 경우 공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정부 정책으로 진행된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적극 피력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한전 재무' 상황이다. 이사회는 한전 재무 여건을 충분히 고려한 후 의결해야 하는데, 심각한 적자에 추가 손실을 떠안는 행위는 법정에서 경영진 배임으로 판결날 수 있다는 게 법률전문가 의견이다. 한전은 지난해 1조1745억원 손실을 내면서 6년 만에 적자 전환했고 올 1분기에도 6000억원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2분기에도 흑자 전환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부는 지난해에도 여름철 한시 요금할인이 8월에 결정, 7월분 전기요금 할인을 나중에 소급적용한 사례가 있다며 이사회 의결이 늦더라도 올여름 누진제 개편안 시행은 문제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한전에서 누진제 완화에 따른 손실보전을 법제화해 달라고 요청한 건 아직 없다”면서도 “한전에 과도한 부담이 가지 않도록 합리적 대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재필기자 jp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