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진입규제 수준이 중국은 물론 이집트보다 뒤처진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 신산업 진입수준 3가지 덫으로 기득권 저항, 포지티브 규제, 소극행정이 꼽혔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미국·일본·유럽연합(EU) 등 경쟁국보다 불리한 신산업분야 대표규제 사례'를 담은 보고서를 22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진입규제는 경쟁국보다 매우 높다. 국제연구기관 글로벌기업가정신모니터(GEM)는 한국 진입규제 환경을 조사대상 54개국 중 38위로 평가했다. 미국과 일본, 중국은 물론 이집트보다도 낮다.
대한상의는 의료, 바이오, 정보통신기술(ICT), 금융 등 주요 신산업 분야에서 경쟁국보다 불리한 사례 분석을 통해 국내 진입규제 장벽이 높은 이유로 △기득권 저항 △포지티브 규제 △소극행정 등을 꼽았다.
◇기존 사업자 강력 반대 '기득권 저항'
대한상의는 신산업 기회를 가로막는 원인으로 가장 먼저 '기득권 저항'을 지적했다. 상의는 혁신적 아이디어가 나와도 기존 사업자가 반대하면 신산업은 허용되지 않고, 신규사업자는 시장에 진입조차 못하는 실정이다. △원격의료 금지 △차량공유 금지 △각종 전문자격사 저항 등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스타트업 A사는 스마트폰앱으로 심방세동을 측정해 의사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진단기기를 개발했다. 유럽심장학회 학술대회에서 1위로 뽑힐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지녔지만 국내 출시는 못한 채 유럽시장을 공략 중이다. 생체 정보를 의사에게 전달하는 기능이 원격의료에 해당돼 국내법상 불법이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B사는 스마트체온계와 스마트폰 앱을 연동한 영유아 건강관리 서비스앱을 개발했다. 체온, 발열, 구토, 반점 등 증상을 입력하면 의사가 대처법을 알려주는 서비스다. 그러나 의사가 스마트폰앱을 통해 대처법을 알려주는 것은 의료법 위반이라 국내서는 사업을 할 수 없다.
기득권 반대가 가장 심한 분야는 의료분야다. 미국·유럽·중국 등에서는 원격의료가 전면 허용됐다. 중국은 텐센트·바이두 등 ICT 기업들이 원격의료를 접목한 다양한 헬스케어서비스를 선보였다. 반면, 우리나라는 의료계 반대에 막혀 시범사업 시행만 십수년째다.
강영철 한양대 특임교수는 “규제개혁이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이해관계자 등 기득권 반발이 심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지도 부족하기 때문”이라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가 먼저 개혁여부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정한 뒤에 이해관계자들의 이익관계 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정해진 것만 하는 '포지티브 규제'도 문제
시대착오적 포지티브 규제도 여전한 문제로 꼽혔다. 경쟁국은 네거티브 방식으로 혁신활동을 보장하지만 우리나라는 정해진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포지티브 규제로 혁신활동이 봉쇄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DTC(Direct-to-consumer) 유전자검사 항목 규제가 대표적이다. 국내는 현행법상 체지방, 탈모 등과 관련한 12개 항목만 허용한다. 최근 규제샌드박스 심사를 통해 13개 항목을 추가로 허용했다. 반면 영국, 중국은 DTC 검사 항목을 따로 제한하지 않고, 미국도 검사 항목을 폭넓게 허용한다.
김정욱 KDI 규제센터장은 “최근 정부가 규제샌드박스를 통해 검사항목 확대를 위한 규제특례를 허용했지만 여전히 경쟁국에 비해선 상당히 부족하다”면서 “건별 심사를 통해 샌드박스에서 승인 받은 사업만 가능하도록 한 포지티브 방식으론 명확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혁신과 숙박공유도 포지티브 장벽에 갇혀 있다.
핀테크업체 관계자는 “인공지능(AI) 기반의 새로운 펀드상품을 개발했으나 법으로 정해진 펀드만 판매할 수 있는 규제 때문에 상품출시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도심형 숙박공유업도 외국인관광 도시민박업, 한옥체험업, 농어촌민박업 등 법으로 일일이 나열해 허용하고 있어 외국인만 이용가능하고 내국인은 이용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로 인해 우수한 기술을 갖춘 기업이 어쩔 수 없이 외국으로 가는 실정이다.
유전자검사업체 C사는 침으로 유전자정보를 분석해 질병예측이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고도 출시를 못했다. 국내에서는 유전자검사가 비만, 탈모 등 12개 항목으로 제한되어 치매나 암 등 질병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C사는 암을 비롯해 300여개 이상 항목 검사가 가능한 일본에 법인을 세워야만 했다.
스타트업 D사는 고객이 셀카 이미지를 올리면 이를 분석해 AI가 맞춤형 안경테를 추천하는 안면인식 서비스를 개발했다. 얼굴 이미지 분석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소지가 크다고 판단해 국내 출시를 포기했다. 한편 중국은 D사 기술을 높이 평가해 전폭적 지원을 약속했고, D사는 중국 진출을 추진 중에 있다.
대한상의는 “정한 것만 허용하는 현행 포지티브 규제방식 하에서는 기업은 일을 벌이기가 힘들고, 혁신기업 출현도 요원할 것”이라면서 “중국 등 경쟁국이 규제 않는 분야에선 필수 규제를 제외한 모든 규제를 제로베이스 상태에서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한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의 소극행정도 규제장벽
대한상의는 공무원들의 소극행정도 규제장벽으로 지목했다.
대한상의는 “기업인들이 느끼기에는 해외공무원들은 규제완화를 돈 안드는 가장 효과적인 투자라고 보는 반면, 우리나라 공무원은 규제강화를 돈 안드는 가장 확실한 대책이라고 보는 인식차가 존재한다”면서 “기업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해도 각종 행정편의주의, 규제의존증으로 인한 공무원들의 소극적 태도 앞에 번번이 무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에너지업체 E사는 2016년 친환경 설비를 도입키로 했다. 사업을 하려면 지자체에 관련 업종 허가를 받아야했다. 수차례 요청한 끝에 겨우 허가를 받았지만, 일부 사업만 가능한 반쪽 허가에 불과했다. 허가범위 확대를 계속 건의해도 지자체는 지역민원을 이유로 허가를 내주지 않고, 담당자도 해마다 바뀌는 바람에 제자리걸음인 상황이다.
인사노무 업체 대표 A씨는 IT기반 HR로 업종전환 후 벤처기업 인증을 신청했지만 이공계 전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탈락했다. '전공' 탓이었다. 모자란 점수를 채우기 위해 보충할 자료를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제출했고, 겨우 인증을 받을 수 있었다. 또 다른 IT벤처 대표 B씨는 이공계 전공이 아니라는 지적에 관련 학위를 취득한 끝에 관련인증을 받을 수 있었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적극행정이 제도화됐으나 문제발생 이후의 소명과 면책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면서 “공무원들이 문제되는 규제를 스스로 발견해 없앨 수 있는 인센티브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영석 대한상의 규제혁신팀장은 “공무원 사회에서는 규제를 풀면 부처 권한이 약해지고 다른 공무원에 피해를 줄 것이라는 민폐의식이 여전한데 공무원 사회의 보신행정 문화부터 개혁해야한다”고 말했다.
대한상의는 “기득권과 포지티브 규제, 소극행정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규제를 개혁하는 것이 아닌 혁신을 규제하는데 그칠 것”이라면서 “탈규제원칙 하에 사회 곳곳에 자리잡은 기득권을 걷어내고 전면적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을 통한 과감한 규제개혁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말했다.
권건호 전자산업 전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