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은 옛날 미국이 아니다. 학회 일로 미국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점은 한마디로 불편함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입국 심사 과정, 늦은 인터넷 속도와 비싼 숙박 요금, 차가 없으면 움직이기 어려운 열악한 대중교통, 위태로운 치안 상황 등이 괴롭힌다.
부러운 것도 많다. 맑은 공기와 여유 있는 공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것 등이다. 그러나 학자로서 가장 부러운 것은 미국 대학·연구기관·기업 등에 힘입은 학계의 경쟁력이다.
팍스아메리카나 시대가 저물고 G2 시대가 되면서 미국의 산업, 무역, 에너지, 복지 등 국가 경쟁력 전반이 도전을 받고 있다. 특히 자동차·철강·조선·가전 등 전통 산업의 일자리를 아시아 국가에 빼앗기고, 이를 선거 이슈로 삼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금융, 국방, 항공우주, 의료, 소프트웨어(SW) 등 지식 집약형 산업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인재 양성과 기술 개발로 뒷받침하는 학회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앞으로 30년은 다른 국가가 넘볼 수 없는 영역이다. 무엇이 미국 학계를 경쟁력 있게 만들었을까. 또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도전적 연구 주제다. '개척자 나라'답게 미국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은 세계 최초이거나 최고로 어려운 연구 주제를 절대 다수가 선호한다. 그 결과 연구 주제가 양극단으로 갈린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주제여서 성공 가능성이 아주 옅은 연구와 기업체가 곧바로 갖다 쓸 수 있는 아주 어려운 실용 연구다. 특히 국립과학재단(NSF), 국방성, 에너지성 등 정부기관의 연구 과제에서는 기초 연구 비중이 높다. 주제가 실용이다 보니 정부 과제에서 탈락하기도 한다. 기업이 알아서 할 연구이기 때문이다. 성공 가능성이 보여야 지원하는 우리에겐 교훈이다.
둘째 학계의 개방 분위기다. 인종, 국적, 성별, 학벌, 나이 등을 불문하고 실력이 있으면 환영한다. 미국 대학은 대부분 정년이 없다. 그 대신 엄격한 평가제도가 있다. 학문 간 융합도 활발하다. 인지과학, 언어과학, 뇌공학, 기전공학, 바이오정보학 등이 그 산물이다. 학교, 연구기관, 회사를 옮기는 일도 잦다. 종신교수가 되고 이직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러면 대우가 향상된다. 미국은 정부 연구비로 구매한 장비는 연구자가 자기 소유물로 옮긴다. 우리는 대학원생과 장비 이전이 매우 까다롭다. 사람과 장비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는 것은 개방적 혁신을 막는 일이다.
셋째 학회 활동을 중시한다. 논문을 쓰고 발표하는 것만이 아니다. 국제학회에서 조직 활동을 하고, 학회지 발행과 학술대회를 여는 것에 적극성을 띤다. 이를 통해 본인과 소속기관의 평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승진이나 종신교수가 될 때 저명한 학계 인사 추천을 10명 안팎으로 받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학회가 국위 선양과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예컨대 1년 회비만 약 100만원인 국제전기전자학회(IEEE)에는 160개국에 걸쳐 43만명의 회원이 있다. 그 본부가 있는 미국이 세계 중심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넷째 산·학 협력과 창업을 장려한다. 교수의 창업이나 기업 겸직이 자유롭다.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2~3개 기업의 직함을 갖는 경우가 흔하고, 창업한 기업이 잘되면 교수직을 그만두기도 한다. MIT는 교수 승진 평가 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지를 따진다. 산업체 근무 경험이 많은 산학 교수 임용도 흔하다. 학계에 기업 소속 학자가 적지 않은 것도 우리와 비교된다. 교수에게 9개월분만 월급을 주고 나머지 학기에는 기업에서 근무하게 하는 대학도 많다. 우리에게 교육, 연구, 창업을 삼위일체로 하는 연구 중심 대학이 필요하다.
다섯째 대학의 대형화다. 캘리포니아대, 미시간대 등 많은 주립 대학이 여러 지역의 캠퍼스로 분산돼 있다. 물론 올린공대처럼 소수 정예 사립대학도 있다. 명성 있는 주립 대학에는 좋은 교수·학생·학과가 있지만 규모 자체가 인지도를 높이기도 한다. 우리나라 대학의 25% 안팎이 퇴출 위기에 몰려 있는 가운데 구조 조정과 함께 대학 대형화가 대안일 수 있다. 전제 조건은 대학 혁신이다. 가상대학, 가상랩, 과제 해결형 교육, 교육혁명4.0을 통한 미래사회·신산업 대비는 필수다.
임춘택 광주과학기술원 교수 ctrim@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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