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끈을 고쳐 매면 안 된다.'
초등학생도 아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갓끈이 풀렸는데 오얏나무 밑을 지날 때까지 참아야 하는가. 불편하면 당장 묶어야지.
물론 이로 인해 일어날 오해는 본인의 몫이다. 이것이 싫다면 불편하더라도 좀 더 지난 후에 끈을 묶어야 할 일이다. 이 역시 본인이 감수해야 할 불편함이다.
과학기술계가 시끌시끌하다. 지난해 말 불거진 기관장 퇴임 압박(혹은 권유)과 '타깃' 감사 의혹 논란이 해가 바뀌어도 여전하다. 여기저기서 기관 감사가 실시되고,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온다.
기관에 비리 등 문제가 있으면 감사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가 없어도 감사를 받아야 할 때가 돌아오면 감사를 받는 게 마땅하다. 과학기술이든 어디든 감사에는 성역이 없다.
논란은 하필 지금이 오얏나무 아래를 지나는 시점이기에 불거졌다. 언젠가부터 정권이 바뀌면 정부 산하 기관장 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 정권 초마다 임기를 절반 이상 남긴 기관장이 갑자기 퇴임한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여러 면에서 과거 정권과 다른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 부분에서는 다를 게 없다.
공공기관은 정부의 국정 과제에 맞춰 사업을 펼치는 곳이다. 바로 위로는 관할 부처, 더 위로는 청와대와 엇박자를 내면 곤란하다. 기관장이 나 홀로 다른 길로 가면 정부라는 큰 유기체에 생채기가 생긴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정권 코드가 유효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과학 르네상스는 정권과 관계없이 지속해야 할 과제다. 과학자가 연구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국민을 이롭게 할 분야에 투자를 확대하는 데는 진보와 보수 구분이 없다. 어느 정권도 여기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과학에 정치를 입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한 대학 교수는 지난해 우연히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모임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일부 기관장들이 현 정권 성토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새 정부가 이런 사람들과는 일을 함께 못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기관장 가운데에는 정치권의 줄을 타고 임명되는 인사가 있다. 과학이 아닌 정치로, 역량이 아닌 전 정권의 유력 인사를 등에 업고 기관장 자리에 오른 사람은 오얏나무 아래라고 해서 기다려 줄 필요는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원칙을 되새기는 것이다.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과학계 기관장 및 감사 논란을 놓고 “기관장 임기가 남았는데도 강제로 그만두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관장이 국정 철학을 공유하는지, 경영 역량은 갖췄는지를 살펴보겠다고 했다.
두 가지 원칙 모두 틀린 건 없다. 중요한 것은 정부와 과학계가 이 원칙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
정부가 전 정권에서 임명된 기관장에게 기계처럼 퇴임 압박을 가하는 것은 원칙을 깨뜨리는 일이다. 자신을 임명한 전 정권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새 정부의 국정 과제를 이유 없이 거부하는 기관장 역시 원칙을 어기는 것이다.
결국 정치가 아닌 과학으로 판단하면 될 일이다.
이호준 산업정책부 데스크 newleve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