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113>“디지털행정처 신설해야” 안문석 공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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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석 공동 위원장은 “이제까지 전자정부는 컴퓨터 도움을 받아 공무원이 하는 행정시스템이었다면 앞으로는 공무원 도움없이 로봇과 AI같은 기계공무원이 스스로 하는 행정시스템”이라면서“ 이를 종합 관리할 수 있는 '디지털행정처' 신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윤성혁기자 shyoon@etnews.com

안문석 전자정부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우리나라 전자정부의 살아 있는 역사다. 그의 반세기 삶은 한국 전자정부와 동행했다. 1968년 한국과학기술원(KIST) 전산실 연구원으로 행정전산화에 참여한 이후 전자정부특별위원장으로서 전자정부 기틀을 마련했다. 지금도 전자정부추진위 공동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전자정부 발전에 헌신하고 있다. 그는 전자정부 세계 1위의 주역이다. 안 위원장을 만나 전자정부 50주년을 맞아 전자정부의 과거와 미래, 정부가 유념할 것들에 관해 들었다.

-전자정부 50주년을 맞은 소회는.

▲전자정부 50주년은 내 삶의 역사다. 전자정부 시작 연도인 1967년은 내가 컴퓨터를 처음 만난 해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조교 시절 우연한 기회에 포트란 자습서를 보고 깜짝 놀라 '기계가 사람 명령을 알아듣는구나. 앞으로 이걸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나는 서울대 교수 요원으로 뽑혀 미국 유학을 다녀오면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1968년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2년 만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성기수 박사(전 동명대 총장)를 따라 KIST 전산실 연구원으로 갔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이후 전자정부 잉태기부터 장년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자정부와 동행했다. 전자정부 발전에 헌신한 선각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분들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한국 전자정부는 세계 1위로 발전했다.

-KIST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가.

▲처음 한 일은 컴퓨터 저변 확대를 위한 컴퓨터 언어 교육이었다. 1970년 KIST에서 CDC3300이라는 대형 컴퓨터를 처음 도입하면서 포트란, 코블 같은 고급 언어를 사용했다. '컴퓨터는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 쉽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포트란, 코블 언어 교육을 시작했다. 국내 대학에 전산 관련 학과가 없던 시절이어서 KIST가 고급 언어를 교육하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광고를 내 30여명을 선발, 약 3개월 동안 강의와 실습을 했다. 1기 졸업생 가운데 우수자를 2기 교육 조교로 채용했다. 이어서 정부 공무원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했다. 이 일에는 경제기획원 예산국 강경식 예산총괄과장(전 경제부총리)이 앞장섰다. 예산국 직원 10여명을 선발, KIST에서 교육을 했다. 당시 팀장이 이진설 사무관(전 건설부 장관)이었다. 당시 예산국에서 가장 힘든 업무가 예산 편성이었다. 이들은 3개월 만에 우리 팀과 함께 예산 편성 업무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것이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이다. 최초의 정부 컴퓨터 업무 활용 사례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시에서 세무 업무 담당 공무원 10명의 교육을 의뢰, 이들 대상의 교육을 했다.

서울시도 재산세와 수도세 업무를 컴퓨터로 처리했다. 지방정부 행정전산화의 시초다. 이후 각 부처에서 교육 요청이 쇄도했다. 이를 계기로 KIST와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를 연결하는 컴퓨터 터미널을 설치했다. 최초의 컴퓨터망이었다. 당시 개통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다. 이날 고사를 지냈는데 “첨단 컴퓨터 개통식에 무슨 고사냐”는 가십 기사를 한 언론이 내보내기도 했다. 이후 부처마다 터미널을 연결, 모든 부처가 KIST 중심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1977년부터 3년 동안 충북도에서 행정전산망 시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전자정부 성과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개척자 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위대한 업적이다. 시작은 무모했고,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성공했다. 공무원과 교수, 민간 협업 결과다. 전자정부는 행정 개혁, 정치 민주주의,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시대별로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1970년대는 전자정부를 과학기술 응용으로 생각했다. 과제를 할 때 '○○○ EDPS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주무 부처는 과학기술부였다. 1980년대는 한국에서 전전자교환기(TDX)를 개발하면서 전화혁명이 일어났다. 공공 컴퓨터를 5대 국가기간망으로 묶는 시대였다. 1990년대는 초고속정보망 구축으로 1초 생활권 시대를 열었다. 정보통신부가 주무 부처다. 2000년대는 전자정부 구축 본격화 시대였다. 전자정부 전성기라 할 수 있다. 2010년대는 숨고르기 시대였다. 지금은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loT)이 몰고 올 제4의 물결을 준비하는 시기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전자정부특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전자정부특위는 정부혁신추진위원회의 특별위원회 형식으로 발족했다. 김성재 당시 청와대 정책수석(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위원회 설치를 주장했다. 당시 행정자치부, 정보통신부, 기획예산처 3개 부처에서 위원장 추천을 받았는데 모두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위원장직을 고사했다. 김 수석이 계속 부탁, 수락하면서 조건을 제시했다. 위원회는 독립 운영하고, 업무는 대통령에게 정책기획비서관을 통해 직접 보고하며, 부처 간 이해 조정은 청와대가 한다는 내용이었다. 권한은 보장받았지만 회의실이 없어 호텔에서 조찬을 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전자정부 구현 의지는 어땠는가.

▲한마디로 의지가 대단했다. 2002년 전자정부 11대 과제 청와대 보고회의 때 나온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 지금도 가슴을 울린다. “내 일생에 좋은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만 오늘이 바로 몇 안 되는 즐거운 날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1대 과제 추진 과정도 정책기획수석을 통해 매주 진도를 보고 받았고, 국무회의나 초도순시 때 전자정부 구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관심과 지원이 없었다면 전자정부 11대 과제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원장으로서 부처 간 이해 갈등은 어떻게 조정했는가.

▲위원장 업무 가운데 70% 이상이 부처 간 이해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전자정부 구축의 기술 지원은 한국전산원장(현 한국정보화진흥원장), 부처 간 조정은 청와대 기획정책비서관이 각각 맡는 투톱 체계를 마련하고 두 사람을 공동실무위원장으로 위촉했다. 매주 조찬을 했다. 회의에서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말고 “된다”는 말을 해 달라고 당부했다. 모든 회의 내용은 투명하게 속기록으로 남겼다. 해법을 찾을 때까지 끝장 토론을 했다. 나는 “특위는 '전자정부 특공대'로서 문제가 있으면 풀어서 일을 하게 만드는 위원회”라고 강조했다. 위원회가 전면에 나서거나 부처와 경쟁을 하지 않았다. 부처 간 이해 조정이 안 될 때만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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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모범을 보인 위원회란 평가를 받은 이유는.

▲먼저 목표를 분명히 했다. 다음은 현실을 직시, 임기 안에 할 수 있는 사업 11개를 선정했다. 위원회는 성과를 내야지 로드맵을 만드는 곳이 아니다. 행자부, 기획예산처, 정통부가 많은 예산을 지원해 줬다. 국회도 전자정부기본법 제정에 도움을 줬다. 특위 위원들의 애국심과 열정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 주도 쉰 적이 없다.

-성과를 내는 위원회가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게 위원장의 열정과 전문 지식이다. 그런 사람을 뽑은 다음 위원장에게 위원 선임을 맡기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 예산, 기술, 규제 3박자를 갖춰야 한다. 예산 부처, 기술 부처, 규제 부처가 지원하는 체제로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위원회는 부처를 지원하고, 부처가 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하는 것으로 한정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게 대통령의 지속 관심과 지원이다.

-노무현 정부 때 초대 정통부 장관 제안은 왜 거절했는가.

▲노무현 정부는 초대 조각 때 '장관 인터넷국민추천제'를 처음 도입했다. 초대 정통부 장관으로 내정해서 연락이 왔기에 고사했다. 당시 고려대 총장이 새로 취임됐고, 그 총장이 연구실로 세 번 넘게 찾아와서 부총장을 제안해 약속한 상태였다. 교수는 행정부의 자문에 응해도 장관직을 맡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거스 히딩크는 벤치에 있을 때 감독이지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에 들어가서 선수로 뛰는 건 타당하지 않다.

-정권에 따라 전자정부 정책이 바뀌었다.

▲5년마다 바뀌는 정권에서 전자정부 콘텐츠가 바뀌는 것은 옳다. 그러나 정책의 중요도가 바뀌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년이면 세상 변화가 크다. 전자정부도 계속 진화해야 한다. 그러나 전자정부가 세계 1위를 했다고 더 이상 발전할 게 없으니 지원을 축소하는 정책은 잘못이다.

-지능형 전자정부 구현을 위해 보완해야 할 점이 있는가.

▲지능형 전자정부는 어느 한 부처가 구현하기 어렵다. 2001년에 출범한 것과 같은 지능형 전자정부특별위를 구성해야 한다. 제4의 물결을 이끌 선각자들이 나와야 한다.

-전자정부 조직이나 역할 조정이 필요한가.

▲이제까지 전자정부는 '컴퓨터 도움을 받아 공무원이 하는 행정 시스템'이고, 앞으로는 '공무원의 도움 없이 로봇과 AI 같은 기계 공무원이 스스로 하는 행정 시스템'이다. 이를 종합 관리할 수 있는 '디지털행정처'의 신설이 필요하다.

-전자정부 수출 확대 방안은.

▲장기 관점에선 교육을 혁신시켜야 한다. 컴퓨터 코딩 교육 실시 등으로 생태계를 복원해야 한다. 단기 관점에선 기업이 해외 진출 시 애로 사항을 정부가 앞장서서 해결해 줘야 한다. 또 한국 전자정부를 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한 전자정부 체험관을 만들고 전자정부 역사관 기능도 겸해야 한다.

-청년들에게 당부할 말은.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릴 때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급변하는 시대에 기술 하나씩은 배워야 한다. 그래야 실업(失業)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좌우명과 취미는.

▲좌우명은 '꿈꾸는 자가 인생의 주인공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꿈을 꾸자'다. 취미는 음악 감상이다.

안문석 위원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전산학 석사, 동 대학원 자원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KIST 전산시스템개발실장을 거쳐 1981년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로 취임해 한국정책학회장, 행정쇄신위원, 규제개혁위원장, 전자정부특별위원장, 고려대 부총장,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장, 정부3.0민간자문단장을 역임했다.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와 전자정부추진위 공동위원장이다. 안 위원장은 시인이자 작사가이기도 하다. 3권의 시집과 10여곡을 작사했다. 저서로 '정보체계론' '한국전자정부론' '무용의 유용성' 등 10여권이 있다. 청조근정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았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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