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대응에 세계 각국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주요 선진국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적극성을 보이며, 현실 위주다.
미국은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을 중심으로 4차 산업혁명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파격의 규제 완화로 이들을 응원한다. 18세기 산업혁명 발상지 영국은 4차 산업혁명도 리드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스타트업 발굴, 소프트웨어(SW) 교육에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기술 강국 일본은 철저히 현실 기반으로 4차 산업혁명 대응에 초점을 맞췄다.
미국, 영국,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4차 산업혁명 대응에 '첫발'을 먼저 뗐다. 그러나 그뿐이다. 아직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아무도 가져가지 못했다. 이들의 장점을 본받아 한국식으로 발전시키고 단점을 반면교사 삼으면 충분히 우리나라에도 기회가 있다는 의미다.
◇美 '범죄 아닌 모든 것을 허용'
미국의 4차 산업혁명 중심지인 실리콘밸리의 입주 기업은 미국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를 '규제'라고 설명했다. 한국 기업이 규제·행정 처리에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사이에 미국 기업은 직접 도전과 실패를 수차례 반복하며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미국 금융업 종사자는 “미국 정부는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판을 만들고 기업은 스스로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면서 “이것이 미국의 4차 산업혁명 대응 방식”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마약·도박 등 범죄와 연결되지 않는 사업이면 무엇이든 가능한 환경을 갖췄다. 구글, 애플의 뒤를 잇는 혁신 기업이 꾸준히 나올 수 있는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는 평가다.
주은광 넥스트도어 시니어 개발자는 “이미 실리콘밸리는 기술 자체를 뛰어넘어 그 이후의 이슈인 구글세, 로봇세 등을 고민하고 있다”면서 “정부는 기업을 뒤에서 밀어주고 제도를 신속하게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공론의 장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부가 아닌 민간이 4차 산업혁명 대응을 주도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미국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제조업 중심으로 4차 산업혁명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제너럴일렉트릭(GE)의 '산업 인터넷'이 있었다. 산업 인터넷은 산업 현장의 기계, 첨단 분석 기술, 작업자를 서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기존 설비나 운영체계를 최적화하고 비용을 절감한다.
실제 GE는 산업 인터넷을 항공기 터빈 제작, 풍력발전 분야 등에 활용하고 있다. 이 회사는 2011년부터 10억달러를 투자해 산업 인터넷을 개발하고, 2014년에는 산업 인터넷 플랫폼인 프리딕스 부문에서 40억달러 매출을 올렸다.
GE 외에도 미국 기업의 4차 산업혁명 대응은 두드러진다. 구글은 2001년 인공지능(AI) 기업을 인수, 관련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테슬라, 포드, 제널럴모터스(GM)는 자율주행자동차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3D시스템스는 3차원(3D) 프린터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스트라타시스는 세계 3D프린터 시장 절반을 점유하고 있다.
◇산업혁명 발상지 영국 “4차, 우리가 주도할 것”
18세기 산업혁명을 일군 영국은 4차 산업혁명의 리더가 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전히 과학기술과 금융 강국으로 명성이 높지만 산업을 주도하지 못했다는 반성 때문이다. 영국이 자동차, 증기기관차, TV, 인터넷을 발명했지만 정작 산업 성과는 미국 및 독일 등이 가져갔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2014년 코딩 수업을 초·중등 필수 과정으로 채택했다. 최근에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뛰어난 스타트업을 세울 수 있는 인재를 찾고 있다.
올해 초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할 중장기 전략으로 '디지털 전략 2017'을 발표했다. 영국 정부는 디지털 경제가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이후 겪어야 할 경기 침체의 대안으로 보고 있다. ICT 기반으로 새로 창출할 경제 규모가 브렉시트로 인해 축소될 규모를 능가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만큼 절실하다. 정부, 기관, 대학 할 것 없이 팔을 걷어붙였다.
영국 정부가 지원하는 '테크시티'는 스타트업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영국에서 창업을 고려하는 인재를 선발, 비자 5년을 보증해 준다. 비자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영국이지만 이 비자만큼은 어떤 제한도 없다. 사업을 해도, 석·박사 학위를 취득해도, 취업을 해도 된다. 5년이 지난 후 영주권 신청까지 할 수 있다.
런던시가 지원하는 기관 '런던&파트너스'는 스타트업이 아이디어를 개발·공유할 수 있는 공간지원부터 투자자 연결까지 다양한 업무를 수행한다. 갓 창업한 스타트업이 아이디어만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많다. 초기 투자 단위도 1억~2억원이 아니라 10억원을 훌쩍 넘는다.
◇일본, '현실'에 기반을 두고 대응
일본에서 음악 콘텐츠를 유통하는 유센(USEN)은 1961년에 설립됐다. 57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사업 계획, 건물 인테리어, 회사 분위기는 모두 벤처기업을 연상시킬 정도로 젊고 활기차다. 그만큼 4차 산업혁명 대응이 자연스럽고, 초점은 현실에 맞춰져 있다.
유센은 ICT를 활용해 식당, 미용실 등 소규모 가게가 은행에서 쉽고 빠르게 운영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신용카드 단말기에 축적된 결제 정보를 대출 심사 등에 활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핫토리 히로히사 유센 상무집행이사 겸 경영계획실장은 “일부러 4차 산업혁명을 의식하고 추진하는 사업은 아니다”면서 “우리 고객인 가게가 원하는 것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핀테크, 사물인터넷(IoT)을 접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핫토리 실장은 “기본으로는 사람의 편리, 행복에서 출발해야 기술 발전 가속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센뿐만이 아니다. 일본 기업들은 4차 산업혁명을 이미 '현실'로 인식하고 있으며, 자연스러우면서도 적극 대응에 나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정부가 내놓은 정책도 철저히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일본 정부는 4차 산업혁명 대응과 관련 '데이터 확보와 활용'을 핵심으로 강조했다. 다양한 기반 기술에 데이터를 결합하면 부가 가치 창출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특히 구글·애플 등 해외 ICT 기업이 선점한 '가상 데이터'보다 건강 정보, 주행 데이터 등 '현실 데이터' 활용이 일본에 있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라고 평가했다.
일본 정부가 4차 산업혁명 대응 핵심으로 강조한 또 다른 기술은 '로봇'이다. 다른 나라보다 일본이 이미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분야다.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에서 ICT 사업을 담당하는 소프트뱅크테크놀로지는 출입구부터 독특하다. 사람은 없고 전화기와 흰색 로봇이 손님을 맞이한다. 소프트뱅크의 로봇 '페퍼'다.
페퍼가 복잡한 업무 처리까지 담당하지는 않는다. 손님이 말을 걸면 대답하고 안내하는 정도다. 그러나 이런 체계를 갖췄다는 것만으로도 이 회사가 4차 산업혁명을 미래가 아닌 현실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 정부는 기업의 4차 산업혁명을 탄탄한 제도 지원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조은호 KOTRA 일본지역본부장은 “일본 정부는 첨단 분야의 신규 사업의 경우 규제를 일시 유예하는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할 예정”이라면서 “AI, 로봇 등 참신한 사업에 도전하는 기업 지원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조 본부장은 “규제 샌드박스는 기업이 스스로 특례 조치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활용이 적은 '기업실증특례제도'나 특구로 인정될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국가전략특구제도'의 보완책 이상으로 작용할 것”이라면서 “일본 정부는 신사업에 도전하는 기업의 활동 반경을 넓히고 기를 살려 주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 문보경 산업정책부(세종)기자 okmun@etnews.com, 정영일기자 jung0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