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는 규제를 기술혁신 방해 요소로 인식해왔다. 기술발전 속도를 제도가 따라잡기 쉽지 않기 때문에 진부한 규정이 기술 발전의 발목을 잡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규제를 스마트하게 설계하면 중소벤처기업의 기술혁신을 촉진할 수도 있다.
유럽연합(EU)은 일찍부터 이러한 스마트한 규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1980년대 말부터 '새로운 규제 접근법' 일환으로 혁신 조달을 실험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혁신조달은 정부가 물품을 대량 구매하는 기존 공공조달 제도를 기술혁신 활성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제도다. 정부가 직접 수요자가 돼 혁신 부문 시장을 선제 창출하는 것이 목표다.
특정 기술이 반영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정부나 공공기관이 미리 구매함으로써 아직 시장이 형성되지 못했거나 상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한 기술을 중소·벤처기업이 적극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성과 지향 제도다.
EU의 많은 국가는 이러한 혁신 조달제도를 일찌감치 도입했다. 핀란드는 친환경 기술이 적용된 에너지 절약형 건물 건설 등 미래 지향적 기술 개발은 물론 아동보호를 위한 위치 추적 기술 개발 등 사회 이슈가 되는 공익 기술 개발도 혁신 조달로 지원하고 있다.
이는 핀란드 정부가 혁신조달을 민간 기술혁신 촉진과 사회가 당면한 문제 해결이라는 복합적인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EU 차원의 대형 혁신 조달 프로젝트도 추진되고 있다.
통합 교통관리 체계인 'CHARM'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총 410만유로가 투입된 이 프로젝트는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고속도로에 통합 적용될 수 있는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도로 관제망 통합 모듈 개발이 목표다. 유럽 전역의 기술력 있는 많은 중소기업이 참여했다.
이러한 혁신 조달은 정부나 공공기관이 미리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기술 개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위험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중소·벤처기업 입장에서는 연구개발(R&D) 실패 위험에도 불구하고 기술혁신에 대한 투자를 공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된다. 또 시장이 잠재적으로 형성돼 사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지게 된다.
과거 규제가 특정 행위를 금지하는 '명령' 형태의 규정이었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규제는 혁신조달처럼 성과 지향적 형태의 규제여야 한다.
스마트한 규제로 제도와 기술혁신이 윈윈할 수 있도록 규제 시스템에 대한 많은 고민이 필요한 때다.
안준모 서강대 교수 jmahn@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