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계열사 현대오트론을 통해 반도체 독자 개발에 나선 것은 차세대 전자장치(전장) 분야의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이다. 전장 분야 핵심 부품이 바로 반도체이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는 엔진을 독자 생산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자동차 업체 가운데 하나다. 이 때문에 기계 분야에선 기술 독립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전장 분야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다. 2015년 엔진제어용 전자제어장치(ECU)를 독자 개발, 아반떼에 탑재했다. 그러나 해당 ECU에 내장된 개별 반도체는 거의 모두 외산이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차량 반도체를 가져와 ECU에 탑재하면 선발 주자를 뒤쫓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 설명이다. 자동차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26일 “지금 시장에서 판매하는 차 반도체 대부분이 외산 자동차 업체의 몇 년 전 신차에 탑재된 제품”이라면서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가 되려면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반도체를 직접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표 사례가 특수 브레이크 기술인 잠김방지제동체계(ABS)다. 지금은 ABS 기술이 대중화됐지만 1970년대 독일 보쉬와 벤츠가 이 기술을 상용화했을 당시에는 '안전의 혁신'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세상에 없던 기술을 먼저 상용화하려면 시장에 나와 있는 부품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원하는 사양의 반도체를 직접 개발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현대오트론이 독일 인피니언, 엘모스반도체,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 합작 ST마이크로와 주문형반도체(ASIC) 공급 계약을 맺은 것은 이 같은 '선행 개발'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현대오트론이 현대자동차와 논의를 거쳐 세부 칩 사양과 기능 등을 정해 주면 인피니언, 엘모스, ST마이크로가 설계와 생산을 맡게 된다. 원하는 사양과 기능을 정해 주는 것 자체가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현대오트론이 설계자산(IP) 소유권을 나눠 갖는다. 현대는 개별 부품으로 일컬어지는 디스크리트 칩을 집적회로(IC)로 통합해 부품 수를 줄이고 원가를 낮출 계획이다.
ASIC 사업이 순항하면 먼 미래에는 설계 작업까지 현대오트론이 맡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미국 애플도 처음에는 ASIC 사업 모델로 아이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만들었다. 이후 설계 역량을 갖춘 기업을 인수하면서 오로지 생산만 파운드리 업체에 맡기는 체계를 만들었다. 현대오트론에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출신 인사가 두루 포진해 있다. 이들은 애플의 상황을 포함해 반도체 업계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ASIC 사업으로 발을 담근 뒤 사업 영역을 점차 넓혀 나갈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업계 전문가는 “과거 반도체 업계는 '티어1'이라 불리는 전장 업체를 통해 완성차 업계에 제품을 공급해 왔다”면서 “그러나 최근 자율주행차 개발 붐이 일면서 직접 거래 비중이 커졌고, 이 과정에서 반도체 분야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크게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