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82> “경제의 정치 이슈화 최소화해야”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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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신 원장은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는 미래 비전 제시와 국민을 단합시키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정치권은 경제의 정치 이슈화를 최소화하며, 기업은 신성장 동력 발굴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한국 경제의 앞날이 어둡다. 정국 불안으로 다수 기업들은 내년도 사업 계획조차 손놓고 있다. 수출도 부진하다. 서민 경제는 영하의 날씨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내우외환 처지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을 1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실에서 만났다. 불황 한파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이 궁금해서다. 권 원장은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의 4대에 걸쳐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한, 흔치 않은 경력 소유자다. 2002년 3월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국가 신용 등급을 두 단계나 끌어올린 일등 공신이다. 대통령 정책기획비서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2차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 국무총리실장(장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2014년 3월부터 한국경제연구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내년 경제는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가.

▲올해 성장률 2.4%에서 내년에는 2.1%로 하락할 것으로 본다. 나라 안팎으로 불확실성이 많아 통화, 재정, 환율 등 정책에 운신의 폭이 좁다. 민간 소비는 올해 2.4%에서 내년에 1.7%로 둔화할 것이다. 설비투자 증가율도 1%대로 전망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한국에는 어떤 영향이 미칠 것으로 보는가.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은 한국 수출과 해외 투자를 크게 위축시킬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에 나설 경우 그동안 대미 수출이 늘어난 정보통신기술(ICT), 자동차, 기계 산업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양허 정지가 되면 연구원 보고서에 따를 때 내년부터 5년 동안 총 수출이 269억달러 손실되고 일자리가 24만개 없어질 수 있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재협상 시나리오별로 치밀한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 경제가 마비 상태다. 당장 과제는.

▲경제부총리가 강력한 경제사령탑 역할을 하면서 경제 불확실성을 없애야 한다. 정부는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한 개혁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정치권은 경제의 정치 이슈화를 최소화해야 한다. 사회 갈등을 극복하는 노력도 해야 한다.

-위기 상황에서는 어떤 경제 리더십이 필요한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을 단합시키는 리더십이다. 한국 경제는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내수 침체와 함께 제조업 경쟁력 악화로 수출이 감소하는 데다 대외 여건도 나쁘다.

-중국의 추격이 무섭다. 어떻게 해야 하나.

▲첨단 기술 산업과 대기업이 우위를 보이는 일부 산업을 제외하고는 중국이 한국과 경쟁하거나 이미 추월한 상태다. 한국의 주력인 전자, 전기, 자동차 산업에서 중국의 추격이 무섭다.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일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기업들은 핵심 원천 기술을 확보하고 주력 산업의 스마트화 및 서비스화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정부는 4차 산업혁명을 통해 미래 성장 동력을 육성해야 한다.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개혁하고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정부와 기업, 국민이 해야 할 일은.

▲현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는 4차 산업혁명을 비롯해 제조업과 사물인터넷(IoT)을 융합하고 서비스 산업을 활성화해야 한다. 의료, 관광, 교육 같은 서비스업의 세계화로 아시아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태국 의료 관광객은 한 해 260만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26.4%인 66만명을 방콕에 있는 붐룽랏국제병원(BIH)이 유치한다. 우리가 지닌 세계 최고의 ICT와 서비스를 융합하면 경쟁력은 충분하다. 금산 분리 완화를 통한 핀테크 산업도 육성해야 한다. 기업은 기업가 정신으로 신성장 산업을 발굴하고,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 국민은 경제 위기 극복에 한마음으로 지혜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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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4차 산업혁명이 미래의 살 길인가.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의 별칭)은 4차 산업혁명의 대표 사례로 인공지능(AI), 로봇, IoT, 자율주행자동차, 3D프린팅, 나노기술, 바이오공학 등을 지목했다. 미국, 독일, 일본 같은 나라는 이미 4차 산업혁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독일의 인더스트리4.0, 미국의 산업인터넷, 일본의 로봇 신전략을 대표 사례로 들 수 있다. 우리는 전통 산업에서 하이테크 산업과 ICT 융합 산업으로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기 위해 컴퓨팅 사고력을 길러 주는 소프트웨어(SW) 교육을 대폭 늘려야 한다. 교육도 암기나 주입식이 아니라 상상력과 창의력 위주로 변경해야 한다.

-벤처나 창업 활성화 방안은.

▲벤처기업은 증가했지만 창업 기업은 적다. 그 대신 벤처기업 비중은 10여년 동안 증가 추세다. 벤처기업 구조를 보면 기술평가 보증과 대출이 전체의 81% 수준인 반면에 캐피털 벤처투자 기업은 3.4%, 연구개발(R&D) 기업은 5.8%에 불과하다. 앞으로 벤처창업을 활성화해야 한다. 또 대기업 소속 기업이 중소기업 벤처기업을 인수합병(M&A)할 경우 계열 편입에서 제외하는 등 특례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규제가 너무 많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하는 정책 단절에 대한 입장은.

▲우리는 5년마다 정권이 바뀌면 기존 정책을 폐기했다. 노무현 정부의 지역균형발전과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이 다 어디로 갔는가.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도 차기 정부에서 계승할지 모르겠다. 외국은 국가 정책을 10년, 20년, 30년 계속 추진한다. 5년 정권이 기존 정책과 단절하면 미래 대응력이 떨어지고 국가 경쟁력도 없다. 5년 안에 무슨 정책 성과를 내겠는가.

-대통령의 주요 덕목은.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달성할 수 있는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다음은 용인술이다. 사람을 적재적소에 임명해야 한다. 대통령이 만기친람(萬機親覽)할 수 없다. 대통령은 큰 정책 방향만 제시하고 실무는 해당 장관에게 맡겨야 한다. 그리고 국민과 늘 소통해야 한다.

-선진국 조건은.

▲나는 다섯 가지로 본다. 첫째 애국심, 둘째 법치(法治)다. 인치(人治)가 아닌 법치를 해야 한다. 셋째는 배려, 넷째는 개방과 복지다. 마지막으로 복지 포플리즘을 경계해야 한다.

-청와대 비서실 근무를 4대 정부에 걸쳐 했다.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은.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때는 경제수석비서관실 행정관, 김대중 정부 때는 산업통신비서관, 노무현 정부 때는 정책기획비서관으로 근무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부드러운 스타일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 투사답게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김영섭 당시 경제수석과 금융비서관인 나는 매일 밤 2시까지 일했다. 저녁도 청와대 반경 1㎞ 이내에서 먹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거나 직접 불러서 “부도 내면 안된데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메시지는 짧고 분명했다. 대통령 지시에 혼선이 없었다. 글도 단문이었다. 비서실에서 말씀 자료를 올리면 절대 그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포함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은 소통을 잘했다. 주요 이슈에 관해 참모들과 토론을 즐겨 했다. 몇 시간씩 토론한 적도 많다. 나는 한 달에 한 번꼴로 관저에 불려갔다. 지금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수석들이 대통령을 못 만났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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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공직 생활 가운데 가장 보람 있은 일은.

▲외환위기 시절 무디스에 가서 한국 신용 등급을 2단계 올린 일이다. 당시 나는 재경부 국제금융국장이었다. 진념 당시 부총리와 3월 초에 미국으로 날아갔다. 당시 한국 신용이 두 등급 올라갈 가능성은 10% 미만이었다. 진 부총리가 나한테 “두 등급 올리면 한 계급 특진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실제 신용 등급이 `Baa2`에서 `A3`로 두 등급 올라갔다. 무디스 측에서 3월 28일 오전 10시 발표 한 시간 전에 나한테 연락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열린 `월드컵 경제 분야 종합보고 대회`에 참석해 있었다. 진 부총리를 통해 두 등급 상향 조정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 대통령과 참석자들이 너무나 기뻐 그 자리에서 `만세 삼창`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진 부총리가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해 이임하는 자리에서 모 기자가 `권 국장을 특진시킨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일을 너무 잘해서 그 자리에 더 있어야 한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2003년 북핵 위기 시 반기문 당시 대통령 외교보좌관(현 유엔 사무총장)과 차영구 당시 국방부 정책실장(육군 중장)이 비밀리에 무디스를 방문, 국가 신용 등급 하향을 막은 일도 보람 있는 일이다. 등급 유지 결정 소식에 반 보좌관, 차 중장과 나 이렇게 세 명이 회의장 복도에서 어깨동무를 하고서 펄쩍 펄쩍 뛰었다. 창피함도 없었다.

-규제 개혁은 왜 제대로 안 되는가.

▲여러 원인이 있다. 규제는 한 번 만들면 풀기 어렵다. 공무원들은 기존에 행사해 온 권한을 내놓기 싫어한다. 여기에 규제 이해 당사자들이 반대한다. 누구를 위해 행정을 하고 정치를 하는지를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살펴봐야 한다. 규제는 가만 놔두면 안 없어진다.

-좌우명과 취미는.

▲좌우명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취미는 등산, 테니스, 골프, 조깅 등이다. 낙하산 없이 4700m 상공에서 뛰어내리는 스카이점프도 했다.

권 원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밴더빌트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석사, 영국 런던시티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를 취득했다. 행정고시 19회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재정경제부 국제금융심의관, 주영국 대사관 재경관, 국제금융국장, 국제업무정책관, 차관보, 대통령 정책기획비서관, 재정경제부 2차관을 거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를 지냈다. 국무총리실장(장관)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지난 2006년 재정경제부 2차관 시절 `스크린 쿼터 폐지 반대` 여론에도 강연 등을 통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스크린 쿼터는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 소신파다. 저서로 `내가 살고 싶은 행복한 나라`가 있다.


이현덕대기자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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