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우의 성공경제]<53>실패한 선발주자(2), 다이얼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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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공짜 인터넷전화가 일상화됐지만 세계 상업화는 1999년 다이얼패드가 처음이었다. 이 서비스는 새롬기술 미국지사에서 엔지니어 4명이 1997년 말 외환위기 때 본사 지원이 거의 끊긴 상태에서 1년 동안 고생하며 절박하게 만들어 낸 히트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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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업은 1998년 말 크리스마스 휴가 때 인터넷광고 단가가 올라가고 전화비는 내려가는 것을 보고 광고를 보여 주는 대신 공짜 전화를 제공하는 수익 모델을 구상하면서 시작됐다.

1999년 3월 한국계 벤처캐피털 투자를 받아 실리콘밸리 동북부에 있는 한 건물에서 다이얼패드를 창업하고 그해 10월 13일 제품을 출시했다. 당시 이미 인터넷전화 기술은 있었지만 관련 파일을 PC로 내려 받아야만 했다. 그 대신 다이얼패드는 웹사이트에서 곧바로 전화를 걸 수 있고 무료여서 처음부터 호응이 엄청났다.

다이얼패드에 투자한 새롬기술의 주가는 당시 액면가 640배까지 치솟았다. 새롬기술은 오상수 사장 등 한국과학기술원 전산과 석사 출신들이 1993년에 설립한 회사다. 이들 대부분 해외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사업 비전을 설정했다. 창업 초기 팩스맨에 이은 새롬 데이타맨은 1998년 무료로 쓸 수 있는 `IMF 버전`을 출시하면서 경쟁자를 제치고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1999년 8월 코스닥 시장에 상장, 시가총액이 다이얼패드 성공에 힘입어 한때 5조원이 넘었다.

그러나 빠른 성장만큼 추락도 가팔랐다. 닷컴 버블 직후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 2003년 경영권 분쟁으로 창업자 오상수 사장이 물러났다. 그리고 다이얼패드도 창업 2년 10개월 만에 법정관리 신청을 했다. 실패 요인을 살펴보자.

첫째 생존 라인 확보에 실패했다. 이는 경영 경험 미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큰 성공 뒤에는 그에 상응하는 커다란 위협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닷컴 버블 이후 수많은 성공 벤처기업이 순식간에 도산한 원인이기도 하다. 다이얼패드도 고객이 최고 1400만명까지 불어나고, 투자자금이 6000만달러나 들어오고, 직원도 170명으로 느는 등 미국에서 급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성공 거품이 순식간에 꺼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비하지 못했다.

당시 경영진은 20~30대 엔지니어 출신이었고, 아이비리그와 미국 대기업 출신 등 화려한 경력자가 많았지만 조달된 자금으로 사업 확장에만 열을 올렸을 뿐이었다. 경력만 보고 뽑은 미국인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자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자금이 거의 바닥날 때까지 최고경영진이 이를 감지 못했을 정도다. 그런 가운데 닷컴버블이 터지고 9·11 테러까지 터지면서 결국 파산하게 됐다.

둘째 하이테크 시장 속성상 주류(Mainstream) 시장의 본격 등장 시기를 예측하기 어렵고, 제품 수명 주기가 짧아서 적절한 마케팅 전략이 필수다. 즉 제품 자체보다 무료통신이라는 고객 욕구를 중심으로 한 시장 정의가 필요했고, 주류 시장이 본격 등장할 때까지 기술 및 시장 변화에 순발력 있는 신축 대응이 필요했다. 당시 다이얼패드의 웹투폰(PC 인터넷에서 일반 전화기로 통신) 방식은 가입자가 늘수록 유선망 이용료가 많아져서 적자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셋째 사회 정당성(Social Legitimacy) 확보가 더 필요했다. 당시 인터넷 사업, 특히 광고를 활용한 무료 인터넷 서비스는 오프라인 중심의 기존 경제·사회 체제에서는 생소했다. 사업 방식의 본질에 대한 의문도 팽배했다. 이러한 의심은 자본 시장으로부터의 자금 확보에 악영향을 미쳤으며, 경영권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비록 20~30대 젊은이들의 선발 도전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 실패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실패의 경험이 사회에 축적, 성공 씨앗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장우 경북대 교수·전자부품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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