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리뷰┃‘시발, 놈: 인류의 시작’] 발칙한 상상력, 저예산 영화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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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발, 놈: 인류의 시작' 포스터

[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태초에 천지를 울리는 폭발이 있었고 원숭이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나타났다. 후대는 이를 인류의 시작, 시발(始發)놈이라고 불렀다.

영화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시궁창 같은 우리의 인생이 과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걸까란 의문을 갖게 된 한 감독에 의해 탄생했다. 백승기 감독은 우주과학잡지부터 성경책, 고대미술까지 뒤졌고, 이것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독창적인 감각과 기발한 상상을 영화에 펼쳐냈다. 모든 이론이 혼합된 이 영화는 멜로부터 SF, 코미디, 범죄, 어드벤처, 에로까지 인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룬다.

가장 적은 예산으로 가장 큰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백 감독의 의지도 놀랍지만, 실제로 단 1천만 원에 인류의 기원이라는 거대한 세계관을 영화에 담았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유인원이 존재하는 시대를 영화에 담기 위해서는 보통 CG를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과감하게 CG가 아닌 털옷 또는 나체로 대신한다.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은 백 감독의 색깔을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번 영화를 통해 백 감독은 저예산 영화라도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가장 재밌는 것은 이 영화에 대사가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유인원과 이제 막 인간이 된 인물이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는 대사 없이 행동으로 표현한다. 대신 영어 내레이션과 자막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영어가 나온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감독은 중학생 혹은 초등학생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며 ‘쇼 미 더 머니’나 ‘쌤쌤(same same)’, ‘로또’와 같은 친근한 영어(?)를 내뱉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해설자는 극에 직접 개입을 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로, 영상을 멈추고 해석을 한다든가 빨리감기 장면에서는 내레이션도 빨리 진행해 웃음을 자아낸다.

장난스럽게 진행되지만 이 영화는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처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 인간에게는 신기한 것투성이다. 맛있는 것부터 사랑, 권력까지 달콤한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처음으로 불신이나 이별, 고독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는 ‘놈’의 ‘시발점’을 통해 감독은 인간의 ‘성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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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발, 놈: 인류의 시작' 스틸

최초의 인간 역을 맡은 배우 손이용은 원시인에 빙의해 끼를 펼쳐내면서도 카메라로부터 나체인 자신의 몸을 사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폭소케 한다. 카메라에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백 감독과 손이용의 환상적인 호흡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엔딩 크레딧마저 백 감독의 센스를 보여준다. 극중 등장하는 재미난 소품 만드는 촬영 스케치뿐만 아니라 ‘시발놈1’ㆍ‘약빤 유인원1’ㆍ‘아기’ㆍ‘그냥 유인원6’ 등 캐릭터의 이름을 공개하며 마지막까지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백 감독의 전작인 ‘숫호구’에 이어 또 한 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공식 초청됐으며, 오는 18일 개봉한다.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leejh@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