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당국도 누진제에 대한 국민 여론이 이렇게 악화될 지는 시나리오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제도 손질 검토도 있었다. 전력 수급 안정과 한국전력공사의 흑자경영 도달로 지난해 국정감사에선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위원들이 누진제 재검토를 주문했고,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도 이를 일부 인정까지 했다. 하지만 이후 국회가 20대로 바뀌었고, 산업부 장관도 교체됐다.
이후 산업부와 한전은 누진제 변경 카드를 깊숙이 집어넣었다. 누진제 변경으로 자칫 발생할 수 있는 역효과를 크게 봤다. 저소득층과 고소득층 간 소득 재분배 기능을 안고 있는 누진제는 양날의 검이다. 일부 전기 과사용자에게 전기요금 폭탄을 안기기도 하지만 누진 구간을 축소하면 전체 요금 평준화로 인한 저소득층 혜택이 줄어들 수 있다.
국제사회가 신기후 체제로 접어든 점도 고려해야 한다. 산업계는 온실가스 감축 의무 등을 통해 에너지 효율화와 친환경 경영 등을 강제할 수 있지만 일반인에겐 누진제 말고는 별도의 친환경 유인책이 없는 상황이다.
최근 정책으로 밀고 있는 에너지 신사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누진제가 후퇴하게 되면 주택 시장에서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투자에 대한 매력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 이는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 주택 보급을 기조로 잡은 정부 정책에 치명타로 작용한다.
에너지 신산업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에너지프로슈머 사업도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에너지프로슈머 사업은 소규모 주택용 태양광 사용자가 남는 전기를 누진제를 적용받고 있는 또 다른 소비자에게 판매할 수 있는 구조다. 누진제 전기요금을 납부하는 소비자는 다른 이로부터 전기를 사들임으로써 한전의 누진제를 피할 수 있는 것이 핵심이다. 누진제가 후퇴하면 프로슈머가 전기를 살 이유도 그만큼 줄고, 시장은 자연스레 축소될 수밖에 없다.
전국 확대를 계획하고 있는 계절별·시간대별 요금제도 마찬가지다. 전기요금에 부담이 사라지는 순간 전기가 싼 심야시간대 전기를 전기자동차에 저장했다가 비싼 오후 시간에 쓰는 솔루션이 그 의미를 잃게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의 전기요금 상황에서 누진제까지 줄이는 것에 대한 적정성도 고민해야 한다. 그동안 원전 폐쇄비용, 석탄화력 폐지 등을 주장하며 전기요금은 인상해 기후변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하던 환경단체와 시민단체는 누진제 축소 앞에선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에너지 신산업 육성과 전기 판매 시장 개방,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숙제 앞에 전력 당국은 누진제 개편에 난색을 보일 수밖에 없다.
조정형 에너지 전문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