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반도체 강국이 아닙니다. 메모리 강국이죠. 정부는 이런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올해 초 반도체 업계와 학계 관계자 10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에 앞서 정부는 내년부터 반도체 분야 신규 연구개발(R&D) 예산을 배정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그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메모리는 한국이 세계 1등이다. 그러나 시스템반도체, 장비, 소재 분야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계속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와 학계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래야만 대한민국 수출 1등 반도체 산업의 명맥도 이어갈 수 있다는 논리였다. 반도체 업계 종사자가 두세 명만 모이면 약속이나 한 듯 이런 얘기가 나왔다.
반도체 분야 R&D 예산은 계속 삭감되고 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잘하는 건 메모리밖에 없는데 마치 반도체 산업이 1등인 것으로 오인됐다. 착시현상이다. `잘하는데 정부 지원이 왜 필요한가`라는 것이 예산 삭감의 첫 번째 이유다.
박근혜 정부 들어와 예산은 더 줄었다. 왜 그럴까. 정부 부처 간 `알력 다툼`으로 반도체 산업계가 된서리를 맞고 있다는 평가다.
반도체 R&D 예산 대부분은 `전자정보디바이스사업`에서 나온다. 이 사업의 예산은 정보통신진흥기금(정진금)에서 지원된다. 정진금은 정부와 기간통신사업자의 출연금, 주파수 할당 대가, 사용료 등으로 마련되는 기금이다.
정진금은 지난 1995년 제정된 정보화촉진기본법을 근거로 조성된다. 과거에는 정보통신부가 정진금 조성과 집행을 담당했다. 이명박 정부로 접어들면서 정통부가 폐지됐다. 기금 집행은 산업통상자원부(옛 지식경제부)가 맡았다. 이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미래창조과학부가 신설됐다. 미래부는 다시 산업부의 정진금 집행권을 가져왔다. 결국 산업부는 미래부로부터 소관 산업인 반도체 관련 R&D 예산을 타다 쓰게 됐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미래부는 정보통신진흥기금을 반도체 등 일반 산업 분야의 R&D에 쓰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주장을 펼치며 예산 규모를 계속 줄여 나갔다. 산업부가 관할하는 반도체 분야 예산을 줄이면 미래부의 신규 과제에 더 많은 지원을 할 수 있는 점도 작용했다. 급기야 올해는 신규 반도체 R&D 예산을 아예 배정하지도 않았다. 내년에는 진행되고 있는 R&D 과제 예산도 없앨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산업계와 학계 관계자는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산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는 정보통신산업 뿌리로, 정진금과 연관이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면서 “해당 분야의 경쟁력이 높다는 것은 대기업에 한정된 얘기지 중소·중견기업에는 아직도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A교수는 “정부 예산이 없으면 학교에서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없다”면서 “석·박사 과정을 밟는 학생들에게 줄 월급이 없다”고 토로했다. B교수는 “최근 바이오·나노 분야로 교수와 학생이 몰리고 있다”면서 “예산이 그쪽으로 쏠리기 때문인데 결국 반도체 인력은 계속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팹리스 업체 대표는 “인력 수급이 힘들면 한국 반도체 산업계의 허리인 팹리스 산업계가 무너진다”면서 “매년 인력이 줄어들어 사업을 끌고 가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C교수는 “미래 먹거리도 좋지만 지금 정부의 정책은 오히려 주력 산업을 죽이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고 답답한 심정을 내비쳤다.
이처럼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미래부는 내년도 반도체 분야에 R&D 예산을 일부 배정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 그러나 금액 규모는 과거 대비 축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D교수는 “이른바 제로 예산은 막았지만 이 소동이 벌어지기까지 일반회계 예산 편성 등 아무런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산업부의 잘못도 적지 않다”면서 “중국은 예산을 너무 쏟아부어 세계 각국이 난리인데 한국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정부 예산이 편성되더라도 대기업을 배제하는 운영 기조는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E교수는 “언젠가부터 정부 R&D는 대기업을 완전 배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면서 “이 탓에 결과물이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시스템반도체든 장비·소재든 국내 대기업과 함께 일을 해야 가시의 성과를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