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영화 View] ‘아가씨’, ‘핑거스미스’보다 더 사랑스럽고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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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가씨' & '핑거스미스' 포스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라 워터스 작가의 소설인 ‘핑거스미스(Finger Smith)’를 영상화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와 2005년 방송한 BBC 드라마 ‘핑거스미스’는 비슷하지만 오묘하게 닮지 않았다.

영화에서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분), 하녀 숙희(김태리 분), 백작(하정우 분)은 ‘핑거스미스’에서 각각 릴리 모드, 수전 스미스, 젠틀맨으로 등장했었다.

‘핑거스미스’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인 1860년대 런던 뒷골목과 시골 대저택, 그리고 정신병원 등을 배경으로 한다. 이것들을 한국화하기 위해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의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설정했다. 박 감독은 “신분제도가 있으면서 정신병원이라는 근대기관이 등장할 수 있는 시기여야 했기 때문에 선택했다. 당시엔 일본으로 통해서 들어온 서양문화가 조화롭기도 하면서도 갈등을 일으키는 이질적인 세계였다”고 설명했다. 다만 ‘핑거스미스’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 중 하나인 하녀 수전이 자랐던 도시의 뒷골목이 ‘아가씨’에서는 제외됐다.

‘핑거스미스’는 도둑을 뜻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은어이자 하녀로 들어가기 전 수전의 직업이기도 하다. 런던 뒷골목에서 행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뿐만 아니라 모든 캐릭터들이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들로 구성돼 제목의 의미를 더한다. 도둑인 수전ㆍ젠틀맨ㆍ석스비 부인(수전을 기른 사람이자 계략가)뿐만 아니라 알고 보면 릴리마저 남의 인생을 훔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여기서 초점을 살짝 이동시켜 바라본다. ‘아가씨’는 내 것과 남의 것이라기보다 진짜와 가짜에 초점을 맞춘다. ‘가짜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불쌍하구나’라고 직접적인 대사가 나오기도 하고, 한국에서 일본식과 영국식으로 저택을 지어놓거나 숙부인 코우즈키는 한국인이면서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등 진짜를 버려두고 가짜를 취하려고 한다. 박 감독은 “이들은 거짓말에 기초한 관계다. 코우즈키의 경우엔 정체성이 통째로 가짜다. 그 입장에서 보면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자기기만일 뿐이다. 민족성을 경멸하면서 내다버리고 싶어 하며, 본인을 일본인으로 생각한다. 냉면 먹을 때는 빼고 말이다. 서양풍의 저택에서 냉면을 먹는 신은 사대주의자지만 입맛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이야기 했다.

박 감독이 가장 중요시 했던 것은 아가씨와 하녀, 두 여자의 ‘관계’와 ‘사랑’이다. 드라마에서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숨기고 자신들에게 닥친 사건들을 각자 해결한 후, 끝이 날 때쯤에 서로의 상처와 상대방을 향한 마음을 이해한다. 반면, ‘아가씨’는 둘이 함께 사랑의 힘으로 해결하며 중반 이후엔 연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두 여인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아가씨’에서는 박 감독이 “용기와 탈주가 초점이다. 이것은 모두 사랑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두 여자는 과정까지 함께 헤쳐 나가며 교감하는 것이다.

덕분에 ‘아가씨’에는 멋진 신들이 등장해 쾌감을 선사한다. 히데코의 아픔을 모두 알게된 후 숙희는 코우즈키의 음란 서적들을 모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책을 물속에 던져버린다. ‘내 인생을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 나의 숙희’라는 대사처럼 숙희는 히데코가 저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며, 히데코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이어 히데코와 숙희가 넓은 들판으로 달려가는 신을 통해 여자들이 해방되는 모습을 확실하게 그려냈다. 또한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숙희는 히데코와 보육원 식구들과 짜고 정신병원을 빠져나온다.

‘핑거스미스’에서는 릴리가 스스로 책을 찢는다. 수전 역시 릴리의 진짜 아픔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수전은 정신병원에 본인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병원에 들어가 고초를 받은 후, 그 역시 본인의 힘으로 병원에서 빠져나온다. 끝날 때가 돼서야 수전은 릴리가 그동안 어떤 고통을 받고 자라왔는지, 그리고 서로에 대한 마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된다.

드라마에서는 영화와 달리 가장 큰 반전을 주는 사건과 아가씨와 하녀에 이어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는 주인공이 한 명 더 있다. 드라마에서는 저택에 들어가야 되는 인물이 꼭 수전이어야 한 이유가 하나 더 있는 것이다. 사실 릴리와 수전의 운명이 뒤바뀌었다. 사건을 계획한 석스비 부인은 3부 내내 크게 활약하는데, 박 감독은 출생의 비밀을 가진 두 소녀의 인생 이야기를 과감하게 삭제했다. 박 감독은 “원작에서는 하녀가 정신병원에서 겪는 일부터 출생의 비밀 이야기까지 한 챕터로 할애할 만큼 길다. 아가씨가 백작을 벗어나는데 우여곡절이 있고 굉장히 긴 모험이 펼쳐진다. 거기서 새로운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데, 영화로 옮길 시간도 안됐고, 한국 관객에게는 먹히기 힘든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뺐다. 대신 내가 연속극 시청자처럼 ‘이렇게 맺어지게 해주세요’라는 마음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똑같은 이야기더라도 박 감독을 만나 밋밋했던 장면은 더 박진감 있어지고 원작에 없던 코믹한 부분이 삽입됐다. 김태리의 거칠지만 솔직한 언행이라든가 하정우의 복숭아 먹방 신, 정신병원에 불이 났을 때 등장한 이동휘마저도 제대로 웃긴다. 박 감독은 “하정우를 캐스팅해서인가보다”라고 너스레를 떨더니 “하정우와 김태리가 코믹 쪽을 담당한 셈이다. 숙희는 헛똑똑이라 생기는 유머가 있고 귀엽게 보인다. 하정우의 경우엔 보통 장르 영화에서처럼 치밀한 사기꾼으로 그려진다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 빈 구석이 있고 허술한 악당이다. 원작과 달리 백작은 숙희와 히데코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모른다. 그것도 눈치 못 챌 만큼 본인이 잘난 줄 아는 사람인데, 그러다가 뒤통수 맞는다. 원작에선 뒤통수 맞을 일이 안 벌어지기 때문에 허술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런 역을 하정우가 하다보니까 더 웃기게 보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주희 기자 leej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