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올린 글을 삭제하거나 검색 목록에서 제외하는 이른바 `잊힐 권리( the right to be forgotten)`를 둘러싼 논란이 격화됐다. 정부가 법제화에 앞서 가이드라인(안)을 내놓자 업계는 탈 규제 시대 흐름에 역행한다며 반발했다. 한편에서는 가이드라인이 이용자 권리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사회적 공감대 형성 없는 무리한 추진으로는 이용자, 업계 어느 쪽도 득이 될게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잊힐 권리는 2014년 유럽사법재판소(EJC)가 구글에 내린 판결을 계기로 글로벌 이슈로 급부상했다. 당시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는 과거 스페인 언론에 게재된 기사와 구글 링크가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EJC는 EU정보보호지침에 따라 구글에 관련 링크를 삭제하라고 판결했다.
판결이 나왔지만 구체적 법령이나 가이드라인이 없는 탓에 오히려 논란이 커졌다. 이용자 보호에서 표현의 자유, 알 권리, 정보 공유 등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인터넷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가 얽힌 탓이다. 세계 주요 국가가 이후 법제화 연구에 착수했지만 아직은 진행형이다.
국내도 비슷하다. 한국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인터넷 이용자가 많고 인터넷을 통한 의사표현이 활발하다. 이로 인한 피해와 갈등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이용자가 과거 무심코 올린 글이 발단이 돼 취업, 결혼 등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를 야기한다.
정부가 잊힐 권리 가이드라인 제정을 서두르는 것은 이용자 피해 사례 확산을 선제적으로 막기 위해서다. 이용자는 필요하면 자신이 작성·게시한 글을 삭제한다. 인터넷사업자는 이용자 잊힐 권리를 지원한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동의하고 이견이 없다. 관건은 어떻게 잊힐 권리를 구현할 것인가다.
지난 25일 방송통신위원회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 가이드라인(안)`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는 다양한 이유로 우려를 표시했다.
오병철 연세대 교수는 이해관계가 있는 제3자 개입 시 사업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오 교수는 “이의신청 사유가 공익과 상당히 관련 있는 것이라면 고도의 규범적 판단이 요구된다”며 “사업자에게 `법관 수준` 결정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가치판단 충돌 시 명확한 대책이 없는 접근배제 요청권은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설명이다.
이진규 네이버 수석부장은 이용자 접근배제 요청 시 사업자가 기술·정책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사안이 많다며 반대 입장을 취했다. 이 부장은 “이용자 권리 보장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면서도 “잘못된 용어 정의, 실현 불가능한 예시, 불분명한 판단 기준 등 검토해야 할 게 많다”고 지적했다.
차재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정책실장은 가이드라인 자체에 문제점을 제기했다. 통상적으로 가이드라인은 법률 등 대원칙에 필요한 세부 설명을 담지만 잊힐 권리 가이드라인은 법적 근거가 미약하다는 것이다.
가이드라인 출발점이 된 EU 판결도 실상 관련이 적다. 차 실장은 “EU 사례는 타인이 작성한 게시물 내용이지만 방통위 가이드라인은 자신이 작성한 글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반대로 해석했다. 이 변호사는 “방통위 가이드라인은 자기게시물에 한정돼 유럽 논의에 비해 매우 후퇴한 방안”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반쪽 짜리` 가이드라인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 변호사는 “자기게시물에 한해서라도 사생활 보호, 잊힐 권리를 효과적으로 행사하도록 지원하는 가이드라인은 자기 정보·게시물 관리권 확립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가이드라인을 조속히 확립할 방침이다. 방통위는 이르면 다음 달 초 전체회의에서 가이드라인(안)을 다룬다.
이기주 방통위 상임위원은 “(입법 때까지) 이용자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계속 남는다”며 “현실적으로 완벽히 시행할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하면 가이드라인은 협조 차원으로 운영하면서 문제를 보완해야 한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접근이다”라고 밝혔다.
모든 이해관계자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는 충분한 보완 작업 없는 가이드라인이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발목을 잡는 또 하나 규제가 된다는 것이다.
차 실장은 “국내 인터넷산업은 다른 국가에 비해 규제가 강하다”며 “(가이드라인처럼) 또 다른 형태 규제는 손톱 밑 가시를 제거해 경제성장을 이루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탈 규제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업계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가이드라인은 창조경제 시대 혁신적 시도를 가로막을 공산이 크다. 이 부장은 “기준이 애매모호할 때 사업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작용도 발생한다. 고환경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구글 프랑스가 2014년 EU 개인정보연구반에 제출한 보고서를 인용해 “링크 삭제 요청 가운데 50%가량이 타 사이트 콘텐츠 링크 제거를 노린 경쟁사 어뷰징(abusing) 행위로 판단됐다”고 전했다.
국내 기업 역차별도 우려된다. 가이드라인은 강제사항은 아니다. 그렇다고 국내 기업이 정부가 내놓은 규정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해외 사업자는 그간 사례에 비춰볼 때 적극적으로 따를 가능성이 낮다. 국내 기업이 역차별을 받아 검색 품질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차 실장은 “사회적으로 필요성이 충분히 검증된 규제만 도입하고 그렇지 않은 규제는 과감히 폐지할 것”을 주문했다.
최경진 가천대 교수는 “잊힐 권리 가이드라인 제정 노력은 환영하지만 신중한 검토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호준 SW/콘텐츠 전문기자 newleve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