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매출 목표요? 없습니다. 수치를 정해놓고 쫓으면 오히려 직원 사기만 떨어지고 목표도 이뤄지지 않아요.”
배문찬 EP코리아 대표는 전기업계 ‘덕장’이다. 얘기를 나누면 부드러운 말투와 온화한 성격이 금세 전해온다. 이런 성향은 회사 곳곳에 묻어있다. 휴게실 한 면을 가득 채운 사진에는 직원들의 행복한 한때가 담겨있다. 곰살 맞은 아이디어다. 사훈도 ‘고객 중심, 회사 중심, 가족 중심’이다.
경영이라고 다를까. 배 사장은 직원에게 ‘언제까지’ ‘얼마’라는 목표를 제시하지 않는다. ‘주어진 경쟁에 후회 없이 임해달라’는 당부가 전부다. 그는 “무리한 목표를 먼저 세워두고 직원을 닦달하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위험하냐”고 되묻는다.
이쯤 되면 배 사장 경영 성적표가 궁금해진다. EP코리아는 무정전 전원공급장치(UPS) 설치·유지·보수 전문업체다. 1996년 창업한 뒤 UPS 한우물만 팠다. 지난해 삼성SDS 상암IDC에 1600kvA급 UPS 12대를 공급했다.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규모다. SK C&C 대덕데이터센터, SK브로드밴드 분당센터, LG CNS 미음센터 등 대기업이 발주한 IDC UPS 공급권을 연이어 따냈다. 상대평가가 어려운 시장이지만 사실상 1위 기업으로 인정받는다. 지난해 매출은 500억원. 직원 50명이 이룬 성과다. 이 가운데 엔지니어가 30여명이다. 영업보다 고객 서비스 질을 높이는데 주력한다.
EP코리아는 창업 때부터 줄곧 글로벌 에너지기업 슈나이더일렉트릭으로부터 UPS를 공급받았다. 최초 공급사 실콘이 APC로, 다시 슈나이더일렉트릭으로 인수되는 과정에서도 협력관계가 이어졌다. 슈나이더일렉트릭은 자사 브랜드 가치를 높인 협력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김경록 슈나이더일렉트릭코리아 사장이 “EP코리아는 한국기업과 협력에 있어 롤 모델”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배 사장 부친은 전기업계 원로인 이화전기 공동창업주 고 배수억 회장이다. 배 회장은 후에 다시 수영전기를 창업하고 아들에게 물려주길 원했다. 하지만 배 사장은 아버지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강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한 뒤 대기업에 입사한 배 사장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경영을 해보고 싶었다.
그는 “아버지는 카리스마, 추진력이 돋보이는 스타일이셨다”면서 “그때는 아버지와 다른 방식으로 직접 경영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고 말했다. 배 사장은 창업 후 선친 도움을 한 차례도 받지 않았다. 1998년 IMF 당시 거액 환차손을 입어 경영난에 처했을 때 배 회장이 보증을 선 것이 전부다.
“고객을 불편하게 하지 마라, 직원을 아끼고 사회에 공헌하라”는 아버지 조언은 회사 운영에 있어 금과옥조가 됐다.
배수억 회장은 지난해 작고했다. 생전 사재 25억원을 출연해 세운 삼연장학재단 이사장이 마지막 직함이다. 아버지를 따라 시작한 배 사장 기부활동도 어느덧 10년, 금액으로는 10억원을 넘어섰다.
최호 전기전력 전문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