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윤 전 체신부 장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은 해마다 12월이면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윤 전 장관은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정통부는 우리가 만든 독창적 정부 조직이다. 정통부 출범은 우리가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으로 가는 시발점이다.
1994년 12월 3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긴급 고위당정회의를 소집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는 정부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김 대통령은 정보화를 국정지표로 제시해 오늘날 ‘ICT 강국’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한국 대표 브랜드는 ‘ICT’가 됐다.
정통부 확대개편 최종 작업은 박관용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국회의장 역임) 주도로 철통 보안 속에 추진했다. 윤 장관은 박 전 실장과 중학교 동기다. 지금도 서울 용산구 아파트 같은 동에 산다.
윤 전 장관은 재임 중 한국 ICT사에 이정표를 세운 공직자다. CDMA 세계 첫 상용화로 이 분야 기술종주국 시대를 열었고 통신강국을 실현했다. 1초 생활권 시대를 연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도 이때 시작했다.
‘정보화 대통령’ 김 전 대통령이 지난달 22일 서거했다. 향년 88세. 윤 전 장관은 국가장 장례위원으로 26일 오후 국회에서 거행한 영결식에 참석해 김 전 대통령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국가정보화 추진 21주년을 맞아 윤동윤 전 장관을 지난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텐데.
▲김 전 대통령은 ICT 강국 기초를 마련한 분이다.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 같은 혁신 못지않게 ICT 강국 기반을 구축했다. 정보화를 국정지표로 제시한 첫 대통령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업적은 잘 모른다.
-김 전 대통령 국정운영 방식은.
▲큰 방향만 정하고 세부 사항은 장관에게 위임했다. 권한을 주고 잘못하면 책임을 물었다. 장관에게 부내 인사와 산하기관장 인사권까지 맡겼다. 나도 외부 간섭 없이 원칙에 따라 인사권을 행사했다.
-김 전 대통령 리더십은.
▲김 전 대통령은 일단 정책을 결정하면 믿고 기다렸다. CDMA 세계 첫 상용화도 대통령이 장관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CDMA 상용화 방침을 앞두고 대통령에게 CDMA 상용화 장단점을 보고했다. 대통령이 “자신 있소?” 하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고 했다.
대통령이 잠시 생각하더니 “알았소. 소신대로 하시오”라고 했다. CDMA 상용화를 놓고 당시 정부 부처와 업계, 정치권, 언론에서 논란이 많았다. 날마다 언론이 CDMA 문제점을 다뤘다. 국민 여론에 민감한 김 전 대통령은 언론이 난리 쳐도 한마디도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면 핵심을 정확히 파악해 지시했다.
-체신부 최장수 통신정책국장으로 재임했는데 어떤 일이 기억에 남나.
▲4년 이상 통신정책국장으로 일했다.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TDX 개발 주무국장으로 일했다. 정보통신 분야 싱크탱크인 통신정책연구소(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와 한국전산원(현 한국정보화진흥원)을 설립했다. 국장 시절 나는 과장, 계장들과 계급장 떼고 정책 토론을 많이 했다. 당시 사무관들이 어떤 발언을 해도 허용했다. 토론이 끝나면 최종 정책 결정은 국장이 했다. 당시 처음 토론문화를 도입했는데 각종 정책 개념정립과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장관 재임 중 CDMA 세계 첫 상용화로 통신강국 초석을 마련했는데.
▲나는 장관직을 걸고 CDMA를 상용화하겠다고 다짐했다. 신규 통신사업자는 CDMA기술로 서비스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CDMA 세계 첫 상용화는 우리가 통신강국으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당시 열정을 가지고 땀 흘린 모든 분에게 감사한다.
-CDMA 개발을 놓고 국회에서 논쟁이 심하지 않았나.
▲국회 교통체신위원회에서 내게 업무보고도 받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왜 나와 있는 TDMA 기술을 놔두고 미래가 불투명한 CDMA라는 기술을 상용화해야 하느냐”며 여야 구분 없이 심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상임위 여당간사까지 반대했다.
-기업과의 마찰도 있었다는데.
▲CDMA 상용화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중심으로 업계 공동 개발하기로 했는데 삼성전자는 TDMA 기술 도입을 선호했다. 나는 삼성전자 직원의 체신부 출입을 금지하라고 지시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보름 후 당시 삼성전자 대표가 장관실로 와 “삼성이 CDMA 제품을 제일 먼저 생산하겠다”고 해 금지조치를 풀었다. 실제로 삼성전자가 제일 먼저 CDMA 제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상일이란 알 수 없다. 그때 CDMA 상용화에 반대했던 삼성전자가 지금 휴대폰 세계시장 1위로 최대 수혜자가 아닌가.
-노태우정부에서 사돈인 선경그룹 대한텔레콤을 제2 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했다. 공정성 시비가 일면서 사업권을 반납했는데.
▲당시 사업권을 신청한 기업 중 대한텔레콤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것은 당시 심사위원들의 한결같은 평가였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대통령 사돈이라는 이유로 특혜 시비가 벌어졌다. 당시 송언종 장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정한 심사를 정치적인 이유로 뒤집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곡절 끝에 대한텔레콤이 사업권을 정부에 반납했다.
-문민정부 들어 제2 이동통신사업자 재선정을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맡겼는데 김 전 대통령은 뭐라고 했나.
▲당시 사업자 선정은 태풍의 눈이었다. 엄청난 이권(利權)이 걸려 있어 자칫 잘못하면 공직자들이 다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 전경련에 맡겨 사업자를 선정하기로 결심했다. 일본에 그런 사례가 있다. 일부 언론은 왜 사업권을 경제인단체에 맡기느냐고 반론을 제기했다. 나는 사전에 정책 구상을 했다. 예상 문제와 장점과 단점을 분석해 청와대로 들어가 김 대통령에게 선정방식을 보고했다. 김 대통령이 “전경련 회장이 최종현 회장인데 문제가 안 될까” 하기에 “회장은 비상근이니 부회장단 중심으로 선정하면 문제될 게 없다”고 했다. 그러자 “좋소, 윤 장관 구상대로 하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최종현 전경련 회장에게 전후사정을 이야기했다. 사업자 선정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구자경 LG그룹 회장을 포함해 재계가 적극 협조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승지원에서 회의를 열기도 했다. 황금알을 낳은 사업자 선정이었지만 업계에서 뒷말이 한마디도 안 나왔고 감사원 감사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법과 절차를 엄격히 지켰다.
-장관 퇴임 후 김 전 대통령이 출마를 권했다던데.
▲1996년 총선에 부산 동구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 고교 동기인 허삼수 전 청와대 사정수석이 옥중 출마했다. 의리를 생각하니 출마할 수 없어 그만뒀다. 나 대신 국회에 들어간 이가 정의화 현 국회의장이다. 1998년 부산시장 후보로 당시 김형오(국회의장 역임), 김진재(작고), 유흥수(현 주일대사) 의원을 포함한 신한국당 부산지역 국회의원들이 나를 추천했다. 집안 반대로 포기했다. 나는 공직자로 인생 1막만 살았다.
-하고 싶은 말은.
▲공직자들은 사기를 먹고산다. 공직자가 개혁이나 혁신 대상이 아니다. 권한과 책임을 주고 잘못하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전·현직 공무원이 많이 따른다. 성공한 장관으로도 평가를 받는다.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나.
▲장관은 임기가 없다. 권한과 책임을 갖고 소신껏 일해야 한다. 당시 선정기준을 보니 적재적소 인사와 업무 해박성이던데 내가 성공한 장관인지는 잘 모르겠다.
윤 전 장관은 2001년 신동아가 고위공무원 89명을 대상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 11개 부처 장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성공 장관으로 뽑혔다. 2004년 김호균 전남대 교수가 펴낸 ‘21세기 성공한 장관론’에서도 성공한 장관으로 평가했다.
윤 전 장관은 부처 간 업무 협의가 막히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풀었다. 그 바람에 과천 관가에 “윤 장관이 남태령을 넘지 않게 하라”는 말이 유행했다. 과천청사에 오면 해당부처 장관과 일전(一戰)을 불사했다. 그리고 타결점을 찾았다.
-좌우명과 취미는.
▲공직을 떠난 뒤에는 ‘건강하고 즐겁게 생활하자’를 좌우명처럼 생각한다. 골프와 당구, 바둑이 취미다. 당구는 고교 친구들과 주 2회 한다.
윤 전 장관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행정고시 3회로 1966년부터 체신부 행정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과장, 국장, 실장, 차관을 거쳐 김영삼 정부에서 장관으로 발탁됐다. 체신부에서 마치 사다리 오르듯 사무관에서 장관까지 오른 관료는 윤 전 장관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994년 12월 체신부 장관에서 물러나 굴지의 재벌기업이 러브콜을 보냈지만 거절하고 한국정보문화센터 이사장과 2기 행정쇄신위원으로 일했다. 선이 굵고 소탈한데다 공사(公私)가 분명해 체신관료 대부(代父)로 불린다. 현재는 한국복지정보통신협의회 이사장과 정우회장,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으로 활동한다.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