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쓴 맛: 성장과 성숙
군의관 생활을 막 마치고 의사 초년생인 인턴 시절, 그달은 마취과 수술장 근무였다. 이른 아침부터 이어지는 수술에 점심때를 넘겼다. 눈치를 보다가 겨우 구내식당에 가려는 뒤통수에 대고 레지던트 선생이 외쳤다. “입안에 아직 밥알이 남아 있을 때 뛰어서 돌아올 것!” 아직 군대 훈련소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갑자기 들었다. 쫓기듯 시작한 직장 식생활의 행태가 세월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뒤통수에 대고 감히 소리 지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무엇을 먹는지가 내가 되고 어떻게 먹는지도 내가 된다. 지난 30여 년 동안 내 식생활의 키워드는 ‘조급함’이었다. 허름한 백반집이든, 분위기 끝내주는 프랑스 식당이든 나는 항상 급하게 먹는다. 귀한 손님이 나를 따라 급하게 먹은 경우도 꽤 있었을 것이다. 돈 쓰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들었을 것이다. 초를 다투는 응급 환자를 볼 수도 있으니 빨리 먹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젊은 날의 명분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네 음식뿐 아니라 식문화가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산다. 그들은 먹기 위해서 식탁에 모이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먹는다. 나도 제발 문화적인 식습관을 기르고 싶다. 빨리 먹고, 적당히 먹고, 가리지 않고 먹어온 내가 천천히, 우아하게, 가려서 먹으면 내 삶의 근본이 크게 달라질 것 같다. 목적과 목표는 뚜렷한데 ‘수술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공부가 직업이니 이 문제도 공부해서 답을 찾아볼까.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들여다보면 어떨까. ‘빨리 먹어 치우는 사람’을 연구한 논문이나 책이 있을까.
우선 구글 검색. 대단하다. ‘빨리 먹는 사람’을 영어로 검색하니 ‘빨리 먹는 사람 대 천천히 먹는 사람’이 연관 검색어로 뜬다. 클릭. 의학 전문 기사이니 믿을 만하겠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홀쭉해지려면 천천히 먹어야 한다. 뇌가 포만감 신호를 보내는 데 약 20분이 걸리니 천천히 먹어야 당연히 적게 먹을 수 있다. 빨리 먹으면 신호가 오더라도 이미 지나치게 많이 먹었으니 돌이킬 수 없다. 천천히 먹으면 신호가 더 빨리 온다. 음식도 즐길 수 있어 좋다. 잘 안 되면 촛불을 켜고 음악을 틀고 먹으면서 텔레비전은 꺼라. 음식에 집중해라. 집중 연습은 디저트로 시작하면 가장 쉽다. 디저트가 나올 즈음이면 이미 배가 부르니까. 그래도 안 되면 치과에서 미리 맞춘, 입속 크기를 줄이는 틀을 식사 때마다 쓰면 된다.
또 다른 기사, 하버드 대학교 건강 블로그가 출처이니 더 믿을 수 있을까. 가슴이 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천천히 먹으면 포만감이 빨리 오고 체중 조절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사람에 따라 다르다. 포만감이란 식후 만족감의 일부이고 뇌 역시 위와 장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콜레시스토키닌과 렙틴이 작용하는데 렙틴이 콜레시스토키닌의 신호를 증폭시켜 포만감을 강화한다. 렙틴은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도 상호작용을 해서 뇌에서 식후에 쾌감을 느끼도록 한다 등등. 읽다가 접었다. 의사인 내가 읽어도 어지럽다. 기사 자체가 식욕을 약간 가시게 하기는 한다. ‘식욕은 복합적이고 체중 조절은 도전’이라고 마무리하면서 기사 작성자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역시 하버드답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정도언]
-정신과 전문의, 수면의학 전문의. 프로이트 학파 정신분석가(교육 및 지도 분석가).
-국제정신분석학회 산하 한국정신분석연구학회 회장.
-서울대학교의과대학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교수로 재직 중.
-저서로는 `프로이트 레시피(웅진리빙하우스, 2015.04)`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