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국내 시스템반도체 업계에서 벤처 창업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2000년을 전후로 창업한 티엘아이, 텔레칩스, 실리콘웍스, 엠텍비젼 등 대표적 1세대 시스템반도체 이후 다음 주자가 보이지 않는다. 창업이 없으니 기존 플레이어 위주로 움직이면서 역동성이 떨어지는 모습이다. 휴대폰용 칩에 집중하다가 스마트폰 시장이 열리면서 일제히 직격탄을 맞고 성장이 정체한 이후로는 신규 인력 영입도 쉽지 않다.
◇“모범사례 없으니…” 후배 없는 시스템반도체
시스템반도체 업계에 청년 창업이 드문 것은 △창업 이후 성공적인 엑시트(자금회수) 사례 부족 △칩 설계 이후 시제품 생산까지 소요되는 과도한 초기 비용 △높은 반도체 설계 기술 난이도 때문이다. 성공적으로 기업을 매각하고 이 자금으로 재창업을 하거나 가능성 있는 기업에 투자하는 선순환 사례를 만들지 못한 것은 한국 시스템반도체 20여년 역사에서 가장 아픈 부분이다.
지난 2006년 아나로그디바이스가 국내 DMB 칩 제조사 인티그런트테크놀로지를, 나스닥 상장사인 대만 실리콘모션이 2007년 국내 RF칩 제조사 에프씨아이를 인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올해 근거리 무선통신 기업 레이디오펄스가 해외 진출을 위해 미국 IXYS에 지분 100%를 매각해 모처럼 성공적인 인수합병 사례를 남겼다.
국내 시스템반도체 기업 간 사업부를 인수하는 사례는 있지만 전략적 인수합병으로 덩치를 키우는 시도는 많지 않다.
지니틱스와 위더스비젼이 전략적으로 합병해 최근 핀테크용 마그네틱보안전송(MST) 칩을 새로 개발해 시장을 확대한 것은 대표적 사례다. 어보브반도체도 마이크로컨트롤러(MCU) 역량을 높이기 위해 꾸준히 타 기업 기술과 인력을 인수하는 적극적 기업으로 꼽힌다.
우리 시스템반도체 시장은 창업 후 성공적으로 엑시트하거나 회수한 자금으로 재창업을 하는 사례가 거의 없어 제대로 된 성공 모델을 보여주지 못했다. 모바일게임 업계가 창업이 활발하고 선데이토즈, 데브시스터즈, 네시삼십삼분 같은 성공적인 창업 사례가 꾸준히 등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김달수 티엘아이 대표는 “선배 창업가가 후배 경영자를 양성하기 위해 기회를 주고 지원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티엘아이는 센서 전문 자회사 센소니아를 비롯해 각 분야 전문 자회사를 만들어 육성하고 있다.
김달수 대표는 “티엘아이는 독자 생존을 원칙으로 스핀오프를 준비한다”며 “앞으로도 후배 창업가가 다수 나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회사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적절한 정부 지원 투입해야
창업 회사가 시제품 제작 등 초기 비용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특히 칩 설계에 필수적인 반도체설계 자동화(EDA) 툴을 부담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면밀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한 팹리스 기업 관계자는 “중소 팹리스도 수억원에 달하는 EDA 툴 사용 비용이 부담스러운데 갓 창업한 팹리스는 더욱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며 “시제품 제작과 초기 생산비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규모의 경제력이 약해 연구개발(R&D) 여력이 없는 중소 팹리스를 위해 정부 차원에서 새로운 시장을 함께 발굴하고 지원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사물인터넷(IoT)용 반도체와 전력 반도체는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분야로 꼽힌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가 한국형 CPU 코어 국산화 사업을 추진하는게 대표적이다. 특정 해외 대기업에 의존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핵심 부분품을 점진적으로 국산 기술로 대체하는게 목표다. 사물인터넷 시장에 적합한 CPU 코어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에 접목해 실제 적용 사례를 꾸준히 만들어 낼 계획이다.
이 외에도 설계툴, 드라이버 등 시스템반도체에서 소프트웨어 비중이 커짐에 따라 소프트웨어 개발자 지원을 확대하는 등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환경 개선도 추진할 예정이다.
김정화 산업부 전자부품과장은 “창업 초기기업의 기술 개발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연구성과가 사업화로 가는 과정의 진입 장벽을 제거하는 등 시스템반도체 기술 창업과 인력 양성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국내 파운드리와의 협업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국내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반도체 시제품을 제작하는 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를 지원하는 팹은 동부하이텍과 매그나칩이다. 삼성전자 팹은 첨단 공정을 갖췄지만 높은 비용과 물량 문제로 실제 MPW 제작에 한계가 있다.
팹리스 한 관계자는 “사물인터넷 때문에 미세기계전자시스템(MEMS)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작 국내 멤스 팹은 가동을 중단한 상태”라며 “국내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제품 개발 전 과정에 걸쳐 협업하고 기술 수준을 높여나갈 수 있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표. 산업부가 준비 중인 시스템반도체 발전 정책 방향
△창업 초기 기업의 기술개발 집중 지원
△창업 목표로 한 신진 설계인력 지원 확대
△연구 성과 사업화 진입장벽 제거
△중소 팹리스 기업 성장 위한 중소형 파운드리 기반 유지
△설계자산(IP) 등 R&D 성과물 조기 사업화 프로그램 신설
△시스템SW 개발자 지원센터 확대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