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미디어텍은 국내 반도체설계(팹리스) 기업이 롤모델로 꼽는 세계적 팹리스다. 현지 벤처 기업으로 시작해 세계 반도체 시장 12위로 올라섰다. 2013년 매출은 57억2300만달러(약 6조4000억원), 지난해는 71억4200만달러(약 7조9900억원)로 25% 성장했다. 올해도 새로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와 고객 기업 확보 등으로 성장을 기대할 만하다.
국내 팹리스 업계는 미디어텍이 세계적 기업으로 빠르게 성장한 비결에 주목한다. 기업 성장 전략 자체도 중요하지만 파운드리와 전자 부품 시장이 견고하게 형성된 현지 산업 구조도 성장에 주효하다는 시각이다. 세계적인 전자 대기업이 없는 것도 성공 요인 중 하나다.
◇대량 생산·편리한 서비스로 부상
미디어텍은 1997년 설립했다. 국내 1세대 팹리스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에 집중적으로 창업한 것을 감안하면 출발은 비슷하지만 매출 5000억원을 넘긴 기업이 많지 않은 국내 상황과 대조된다.
미디어텍은 대만 파운드리 기업 UMC에서 분사했지만 종속성을 최소화하며 독립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UMC에서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컴퓨터 DVD 장치와 DVD 플레이어 시장에 진출해 2002년부터 관련 분야 시장 1위에 올라섰다.
영상처리 기술을 확보하고 중국 휴대폰 단말기 시장에 진출해 빠르게 성장했다. 당시 아이서플라이 조사에 따르면 미디어텍은 2004년 베이스밴드 칩 점유율이 12%였으나 2005년 55%에 달할 정도로 빠르게 시장을 장악했다. 2006년 매출은 2조원을 돌파하고 영업이익률은 41.3%에 달하는 등 상당한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미디어텍이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한 것은 규모가 큰 시장을 우선 겨냥했기 때문이다. 기존 시장에 진입한 미국 대형 기업과 경쟁하기 위해 개발 기간을 줄이고 양산 제품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레퍼런스 디자인을 제공하는 전략으로 차별화한 것도 주효하다.
파운드리는 물론이고 패키징, 테스트 등 반도체 후공정 기업이 대만 현지에 고르게 분포한 것도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TSMC와 UMC는 세계 반도체 기업이 생산을 맡길 정도로 전문 파운드리 기업으로 성장했다. 후공정 분야도 세계 시장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세계 시장에서 대만 점유율은 상당하다.
무엇보다 중소기업 위주로 형성돼 전문 분야에 집중하는 현지 산업 구조가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미디어텍 관계자는 “대만에 삼성·LG 같은 세트 대기업이 없는 것이 되레 반도체 산업 성장에 좋은 배경이 됐다”며 “한국은 대기업 위주로 시장이 형성돼 중소기업이 종속된 구조이지만 대만은 현지 대기업이 없다보니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타깃으로 삼아 중소기업끼리 긴밀한 생태계를 조성한 게 성장 비결 중 하나”라고 꼽았다.
◇다 갖추고도 못 크는 한국 시스템반도체
대만에 비해 한국 반도체 산업은 최적 성장 환경을 갖췄다. 세계적 전자 대기업 본사가 한국에 있어 협력하기 좋다. 삼성전자, 동부하이텍, 매그나칩반도체 파운드리 설비도 국내서 이용할 수 있다.
실제로 다수 중소기업은 국내 대기업과 함께 일하며 쌓은 경험을 발판으로 해외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한 관계자는 “한국 이름 없는 중소기업 제품을 써줄 글로벌 기업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삼성·LG에 제품을 공급한 사례가 있으면 해외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을 때 훨씬 유리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좋은 조건은 갖췄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대규모 물량 위주로 서비스를 제공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팹리스는 제한적이다. 기업이 필요한 공정이나 물량을 맞추지 못해 서비스 만족도가 떨어지는 파운드리도 있다. 국내 팹리스 대부분이 대만 TSMC나 UMC에 칩 생산을 위탁하는 이유다.
국내에서 한 대기업에 공급하면 다른 곳으로 판매처를 다변화하기 힘든 것도 문제다. 칩을 구매하는 기업이 다양하지 않으면 사업 변동성이 심해진다. 거래 관계가 끊기면 당장 생존에 직격탄을 맞는다. 종속성이 심해지는 것이다.
한 팹리스 기업 관계자는 “설계자산(IP)을 가진 파운드리와 긴밀히 협력해야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데 국내에서는 이 구조가 힘들다”며 “반면에 대만 파운드리는 아무리 적은 물량이라도 성심성의껏 대응하는 서비스 문화가 잘 돼 있어서 대조적”이라고 평가했다.
이제 한국 시스템반도체는 스프레드트럼, 하이실리콘 등 중국에서 탄생할 제2, 제3 미디어텍과도 경쟁하고 있다. 인텔, 퀄컴 등 세계적 반도체 기업이 중국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이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어 기술력과 기업 규모 모두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까지 갖췄다. 최근 중국 파운드리와 팹리스는 반도체 IP를 확보하기 위해 협력하고 특허를 출원하는 등 활발히 움직인다.
우수한 인재와 고급 기술을 우선 유치하는 ‘천인 계획’, 대학과 기업이 함께 시범형 대학과 직업 훈련 기관을 설립하는 ‘전문기술 인재 지식강화 프로젝트’ 등 반도체 인력도 적극적으로 양성 중이다.
표. 중국 정부의 반도체 인력 양성 방안 (자료: 산업연구원)
-전문 기술 인재 지식강화 프로젝트: 대학과 기업이 공동으로 고급·핵심 기술 보유한 인재 양성. 시범형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대학과 직업 훈련기관 설립.
-해외 교육 프로젝트: 반도체·소프트웨어 인재가 교육받을 수 있는 국제 교육시설 설립.
-천인 계획: 우수 인재 유치. 우수 기업가와 고급 기술을 우선 유치.
-성과 분배: 반도체 기업과 해외 연구기관의 협력 지원. 연구 성과를 지분, 선물옵션, 인센티브로 제공.
-해외 기업 유치: 해외 반도체 기업이 중국에 연구소나 생산운영센터 설립하도록 장려.
표. 2014년 세계 반도체 기업 예상 순위 (자료: IC인사이트)
1위 인텔
2위 삼성전자
3위 TSMC
4위 퀄컴
5위 마이크론
6위 SK하이닉스
7위 TI
8위 도시바
9위 브로드컴
10위 ST마이크로
11위 르네사스
12위 미디어텍
13위 인피니언
14위 NXP반도체
15위 AMD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