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윤 작가의 '젊은 그들' 제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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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시작

마당에 흩뿌려진 낱알을 주워먹는 아기새들이 후딱 흩어졌다. 미옥이 내달리고 있었다. 치맛단에 검은 천을 두른 지나치게 몽당한 치마를 입은 미옥은 빠릿했다. 윤이 반질한 학생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성준이 미옥을 쫒고 있었고 맨머리의 터벅한 덕길은 도련님 성준을 쫒고 있었다.

금세 보였다 금세 사라져버리는 미옥의 무릎 속바지 아래로 드러난 색동 버선이 유달리 어색했다. 미옥은 자꾸 구석으로 구석으로 몰아갔다. 성준은 눈빛이 점점 초롱했다.

“미옥아.”

“도련님, 여기요. 여기예요.”

미옥은 자못 대담했다. 노비의 짓거리치곤 시건방졌다. 덕길은 이 꼴을 보고있자니 안절부절이었다. 입은 소태였다. 입술을 말라비틀어졌다.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덕길이 이놈아. 망이나 봐라.”

“도련님, 아버님이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도련님, 제발요.”

덕길의 입에서 절박한 침이 어지러이 튀었다.

“알았다. 알았어. 이놈아.”

그러나 성준은 말 뿐이었다. 어느새 미옥의 어깨를 지긋이 잡았다. 미옥은 성준을 돌아보고 뱅그르르 웃었다. 미옥의 도톰한 입술이 아직 서툰 꽃잎 같았다. 성준은 자신도 모르게 미옥의 입술에 손가락을 뜨겁게 얹었다. 그러자 미옥이 성준을 손가락을 앙 깨물었다. 성준은 아프지 않았다. 기막히게 황홀했다.

“도련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빨리 가십시다. 제가 볼기 맞습니다.”

덕길의 얼굴은 낮술에 취한 놈 마냥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를 찾으시거든 그냥 모른다고 해라. 네놈이 나이가 몇 인데 그런 융통도 못부리냐?”

“도련님.”

덕길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성준은 깜짝 놀라 덕길을 돌아보았다. 미옥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덕길의 태도가 감히 노비답지 않았다.

“덕길아.”

성준은 쉬이 화내지 않았다. 하지만 쉬이 화를 넘어서고 있었다.

“도련님. 노비라고 이렇게 함부로 대하시면 안됩니다.”

“덕길아.”

미옥의 외침은 차라리 비명이었다.

“도련님. 양반가의 도련님이라고 이렇게 노비 계집을 맘대로 취하고 버리실 작정이면, 지금 그만두십시오, 당장 그만두십시오.”

성준은 덕길에 대한 충격 때문인지 덕길에 대한 정 때문인지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천성이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덕길이 네놈이 미옥이를 염려하는 마음이 남다르구나.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진짜 미옥이를 연모한다.”

순간 덕길은 한켠에 쌓아두었던 나무땔감을 발로 뻥 찼다.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나뭇땔감은 스르르 하나씩 윗단부터 떨어져나갔다. 그러자 덕길은 이번엔 도끼를 들어 나뭇땔감을 내리쳤다. 뻑! 소리를 내며 나뭇땔감들이 파팍 튀며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앗’

미옥은 내뱉지 못했다. 겁부터 났다.

“우리는 짐승이 아닙니다.”

덕길의 눈빛은 무시무시했다. 시뻘건 핏줄이 눈알을 휘돌았다. 성준은 그래도 침착했다.

“덕길아. 그래 너는 노비가 아니다. 맞다.”

“그럼 미옥이를 보내주십시오. 미옥이는 노비도 아니고 창기도 아닙니다.”

성준은 그제서야 찔끔했다.

“덕길아. 나는 미옥이를 진짜 좋아한다.”

“양반 도련님들은 전부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다른 양반집 여자와 혼인을 합니다. 미옥이는 버림받을게 뻔합니다.”

성준은 웃었다. 그리고 덕길에게 다가갔다.

“덕길아. 너와 나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 뛰어놀던 친구다, 일단 화를 풀어라.”

그러나 덕길의 분노는 더욱 치열해졌다.

“당신들의 오입질 때문에 고통받는 짐승이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덕길아. 그만해.”

미옥이는 울부짖었다.

“난 미옥이를 버리지 않는다. 미옥이와 혼인할거다.”

성준은 덕길이의 팔을 간곡히 잡았다.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덕길은 성준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그바람에 성준은 중심을 잃으며 뒤로 쿵 넘어졌다. 그때였다.

“이노옴! 이 노비새끼.”

미옥은 어느새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저 때문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저 때문입니다.”

“어디 감히 천한 노비놈이 양반가의 도련님에게 말대꾸를 하며, 어디 감히 천한 노비 놈이 주먹을 휘둘러?”

성준도 얼른 일어나 역시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제 잘못입니다. 제 이야기를...”

그러나 덕길은 머리통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또 다른 노비의 몽둥이질었다. 미옥은 울지도 못했다. 성준은 얼른 덕길을 끌어안았다.

“덕길아. 덕길아.”

성준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미옥도 허벅지에 몽둥이를 맞고 쓰러졌다.

“에잇, 걸레같은 년.”

소설가 하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