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시작
찌지직 찌지직. 조악한 라디오 전파 소리가 가늘게 찢어졌다. 잠시 후, 찢어지는 전파 소리보다 더 가늘게 찢어지며 웅웅거리는 한 남자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鑑)하여 비상의 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자(玆)에 충량(忠良)한 이신민(爾臣民)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이 이상 교전을 계속한다면 종내에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결국에는 인류의 문명까지도 파각(破却)하게 될 것이다...”거리에는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달려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들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엉엉 울며 대한민국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당당한 깃발처럼 휘날리는 대한민국 만세를 뒤로 조용히 시제 축문을 외우는 소리가 하염없이 낭랑했다. 푸르르 떨던 새가 너른 마당으로 툭 떨어졌다. 동네 아이들의 돌팔매를 맞은 새였다. 죽은 새 옆으로 작은 아기새가 날아와 앉았다. 멍하니 앉은 모습이 오늘따라 비극이었다.
경북 안동.
영광 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경모재(敬慕齋)에서 전통 의식에 따른 시제(時祭)가 있었다. 집안의 높은 어르신들의 절은 정중했다. 한참 뒤에잔뜩 긴장한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민제는 아까부터 휘청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차곡차곡 밟혔다.
‘어디 아프신가? 얼굴이 희미하시네.’
아낙네들과 함께 큰 가마솥을 내걸고 음식 준비가 한창인 어머니는 희끗했지만 오래 전부터 단아한 여인이었다. 어머니는 자꾸만 사당 쪽을 바라보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시제가 한 두 번이 아니거늘 오늘은 유별났다.
드디어 민제의 차례였다. 유일하게 건(巾)을 쓰지 않은 민제가 절을 올렸다. 무릎이 아프도록 절을 깊이 눌렀다. 민제는 아버지의 신위를 뚫어져라 보았다.
“아버님...”
“윷이야.”
너른 마당에는 남정네들이 윷판을 벌였다. 아낙네들은 하늘에 널려있는 방패연을 잡으려는 듯 펄쩍펄쩍 널을 높이 뛰었다.
“민제야.”
민제는 어머니의 심심(甚深)한 부름을 받고 작은방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의 냄새가 났다. 쑥향이었다.
“어머니, 어디 아프신겁니까? 안색이 화사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민제를 빙긋이 쳐다보았다. 아직도 스스로의 자궁 속에 품은 귀하디귀한 아들을 향한 아린 눈빛이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니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프구나.”
민제는 덜컹했다.
어머니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민제 앞에 놓았다. 어머니의 손짓은 종교처럼 경건했다. 민제는 감히 집어들 수 없었다.
“무엇입니까? 어머니...”
민제의 목소리는 살짝 떨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아라.”
민제가 사진을 집어들었다. 기품있고 반듯한 성품을 가진게 분명한 젊은 도련님이 있었다. 전혀 본 적이 없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는 얼굴이었다.
“너의 아버지시다.”
민제는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사진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민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제 장가를 가야지. 아직도 건을 쓰고 시제를 올린다니. 호호.”
“어머니,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웃음을 멈추고 민제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리고 민제의 얼굴을 손으로 꼼꼼하게 쓰다듬었다.
“민제야.”
“네, 어머니.”
“민제야. 너는 내 아들이다.”
민제가 입을 벌리고 웃었다.
“하하. 어머니. 당연하신 말씀을 왜 하시는겁니까?”
“헌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민제는 놀란 눈으로 멈칫했다. 눈을 끔뻑거렸다.
“넌 나의 진짜 아들이지만, 난 너의 진짜 어미가 아니다.”
민제는 아직도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다시 민제의 얼굴을 자꾸 쓰다듬었다.
“눈빛이 상그름하구나. 우리 민제. 우리 민제. 이제 너의 진짜 어머니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
민제는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
어느새 어미를 잃고 허둥대던 아기새가 민제의 옆에 와있었다.
글 소설가 하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