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와 성북구에 걸쳐있는 ‘홍릉’.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시해 당했던 명성황후가 2년 만에 위호를 회복하고 묻히면서 홍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홍릉에 묻힌 명성황후는 22년간 자리를 지키다, 고종이 승하하면서 경기도 남양주로 옮겨 합장하게 된다. 지금은 명성황후의 무덤 터만 남았지만 여전히 홍릉이라고 불린다.
◇아픔의 역사 딛고, 과학기술 산실로
홍릉이 떠난 곳에는 홍릉 근린공원이 조성돼 보존됐다. 이곳에 국립산림과학원(KFRI)이 자리하고, 부속 수목원으로 ‘홍릉수목원’이 마련됐다. 홍릉수목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으로 1922년 8월에 조성되기 시작해 4000여종 30만점에 달하는 식물표본이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됐다가 지금은 북한지역 자생 수종을 제외한 2000여종 20만 개체의 식물이 있다.
1960년대 들어 이곳 홍릉에 변화가 생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이 설립된 것.
초대 KIST 소장을 역임한 최형섭 박사는 회고록에서 “대통령이 홍릉 임업시험장을 장소로 알아보라고 했지만, 농림부에서 못 주겠다고 버텼다”며 “이 결정을 대통령에게 알리자 그 자리에서 농림부 장관과 서울시장을 부르더니 당장 임업시험장으로 가자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대통령이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그보다 더 중요하니 38만평 모두를 주라고 명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15만평을 받아 KIST가 착공됐다. 이때가 과학기술 산실로서의 홍릉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다. 이후 홍릉 일대는 국책 연구기관들이 들어서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었고, 여러 명문대학들이 자리 잡으며 우수한 인재들을 배출했다.
1966년 홍릉에 KIST가 자리 잡은 후 1971년 KDI와 KAIST, 1976년 산업연구원(KIET) 등이 속속 입주했다. 대학은 1905년 고려대가 개교한 이래 서울시립대, 경희대, 한국외국어대가 위치해있다. 90년대 들어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고등과학원, KAIST 경영대학이 합세했다.
KIST가 홍릉에 자리 잡은 후 50여년 간 홍릉 연구단지는 국가 발전의 초석을 닦은 성장 엔진 역할을 해왔다. 1960년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수준의 세계 최빈국이던 국가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경제 성장의 밑그림을 그린 곳이 홍릉 KDI였다. 또 포항제철 설립 타당성 검토, 한국 최초의 물질 특허인 아라미드 펄프 개발, 반도체 성공 신화의 기틀을 닦은 곳도 홍릉 KIST다. 선진 안보를 위해 연구에 몰두해 온 국방연구원이나 국방기술품질원, 국가 산업화와 민주화에 중추적 역할을 홍릉 주변 대학들의 역할도 주목해야 한다.
◇대한민국 미래 이끌 홍릉의 재도약
최근 홍릉은 새로운 변화의 시기에 직면해 있다. 참여정부 시절 추진한 국토균형개발정책으로 홍릉단지내 5개 공공기관이 지방으로 이전한다. 연구단지 공동화와 기능 상실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참석차 KIST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홍릉단지 활성화를 위한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정부는 연내 홍릉단지 활성화 정책의 큰 방향을 발표하고, 내년부터 사업에 착수할 예정이다.
정부 계획 수립을 앞두고 과학기술계에서는 홍릉단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21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서울 역삼동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홍릉연구단지 활성화를 위한 대토론회’를 열고, 과학계 목소리를 모았다.
주제 발표를 맡은 이장재 과총 정책연구소장은 “세계적으로 메가도시형 클러스터가 부상하고 있다”며 “도쿄 국제전략특구, 런던 테크시티, 뉴욕 루즈벨트 아일랜드 프로젝트 등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수도권의 유일한 연구단지인 홍릉지역은 이미 글로벌 지식 클러스터로 도약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면서 “현재 15만평 정도인 홍릉 연구단지를 확대해 새로운 홍릉 사이언스 시티로 재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창조 전략으로는 장기적 구도 하에서 획기적 발전방안을 수립하고, 글로벌 특화 융·복합연구·산업 중심지로 육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역사회와 연계해 서울 동북권 발전의 중심지 역할을 해야 하며, 역사성과 상징성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도시 재생 모델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과제로 꼽혔다.
유럽의 실리콘 밸리 역할을 하는 스웨덴의 IT 클러스터 ‘시스타 사이언스 파크(Kista Science Park)’를 참고로 해 한국만의 단지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더했다.
토론자들도 한국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홍릉단지 조성이 필요하다는 데 힘을 보탰다. 특히 R&D를 넘어 다양한 분야와의 융합, 기업 및 대학과의 연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희재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장은 “홍릉은 우리나라의 마지막 남은 경쟁력 보루이며, 히든카드”라며 “홍릉이 과학, 산업, 교육, 금융을 아우르는 역할을 수행하는 허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신창호 서울연구원 부원장은 “홍릉이 현재의 R&D 플랫폼을 넘어 사업화까지 연계하는 R&BD 플랫폼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석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융합연구본부장은 “홍릉 단지로 기업 연구소를 유치하기 위해 세금감면 등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지역과 연계한 발전도 홍릉단지가 재도약하기 위해 중요한 요인으로 꼽혔다.
윤석진 본부장은 “대덕단지는 설립된지 40여년이 됐고, 입지가 대전 시내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데도 시민과 교감이 전혀 없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며 “이를 반면교사 삼아 지역주민과 같이 가는 단지로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홍릉이 한국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단지라는 데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고,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재창조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박원훈 아시아과학한림원연합회 회장은 “홍릉단지는 1960~1970년대 한국을 오늘의 선진국으로 이륙시킨 임무가 자명하다”며 “수도권 위치한 종합연구단지로 새로운 국격에 맞는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21세기 새로운 한국 위상을 더욱 제고시킬 연구단지로 새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시중 전 과학기술부 장관도 “근시안적으로 홍릉단지 발전방안을 만들면 안된다”면서 “KIST를 중심으로 한 그동안의 역사, 앞으로 나갈 방향, 국민을 위한 합의를 전체적으로 봐야한다”고 당부했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