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윤 작가의 아틸라, The 신라 제33회

Photo Image

5. 암살의 시작

1.

그 탐욕은 바길라스였다. 헤프게 잘 웃는 여자와 같은 바길라스는 작은 체구에 등이 작은 언덕처럼 굽었다. 지나치게 큰 눈을 껌벅이는 눈빛을 보고 있으면, 그가 누군가를, 특히 아틸라를 배신할 거라고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순진무구해 보였고 그렇게 순진무구해서 안타까워보였다.

바길라스는 훈족의 언어와 로마의 언어에 꽤 능통해서 오랫동안 아틸라의 통역관으로 활약해왔다. 그런데 그가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를 만나고 돌아온 것이다. 하는 일 없이 내내 창자가 터지도록 쳐먹고 뒹굴다가, 통역이 필요할 때만 불려나왔다. 아틸라는 통역이 필요없을 정도로 로마의 언어에 능통했지만, 절대 통역관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 아틸라는 대(大) 제국 훈의 제왕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틸라의 특별 사신 자격으로 다녀온 것이지만 오에스테스는 그의 출현이 이상하게 오늘따라 역겨웠다. 그는 늘 바길라스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갓 순진한 눈빛 저 뒤편에 삭으면서 오래된 배반과 음모가 항상 있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그의 굽은 등속에 어떤 살기(殺器)를 감추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오에스테스는 아들 로물루스(Romulus Augustus)를 동행하고 있었다. 콘스탄티우스와 에데코 그리고 에데코의 아들 오도아케르는 바길라스를 무척 반기고 있었다. 로물루스는 희희덕 웃고 있는 오도아케르를 시빗조로 노려보았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께서 아틸라 제왕님을 초대하셨습니다.”

바길라스의 미소는 살려고 몸부림치는 발버둥이었다. 콘스탄티우스도 에데코도 모두 함성을 질렀다. 박수를 쳤다. 그러나 오에스테스는 바길라스의 발버둥이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들 로물루스도 마찬가지였다.

“살아서 돌아오다니...과도한 연회를 즐기다 왔군요.”

“아틸라 제왕님, 가시면 안됩니다.”

오에스테스는 부르짖었다.

“언제부터인가 로마인들은 제왕님을 ‘아틸라 더 훈’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제왕님은 단지 훈의 칸이 아닙니다. 현재 제왕님은 거의 대부분의 땅을 정복해 오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로마만 남은 것이지요. 실상, 로마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스틸리코를 내세워 자신의 땅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서고트의 알라리크는 로마를 겁탈했었습니다. 그 후 아틸라 제왕님에게 수도 없이 짓밟히면서 조공을 바치면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며 스스로 대(大) 로마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로마는 아틸라 제왕님의 복속국가입니다. 노예국가입니다. 아틸라 제왕님이 그들에게 가셔서는 안됩니다. 테오도시우스가 이리로 와야 합니다. 조공을 바치는 주제에 아틸라 제왕님을 감히 초대라는 말로 우롱하다니요. 정말 로마의 멸망이 당장 눈 앞에 보이는군요. 로마도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틸라는 오에스테스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러나 바길라스는 이미 타버린 그루터기에 새순을 억지로 돋우고 싶어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께서 아틸라 제왕님을 멸시해서가 아닙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님은 호노리아 공주님을 서로마로 돌려보낸 것을 매우 죄송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 일은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협박때문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틸라 제왕님께 특별한 연회를 베풀어 용서를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로물루스와 오도아케르가 아틸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로마를 멸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다툼은 기어이 치열했다.

그때 아틸라의 세 아들이 들어섰다. 첫째 아들은 엘락, 둘째 아들은 덴기지흐, 셋째 아들은 에르낙이 있었다. 셋째 아들 에르낙의 이름은 바로, 아틸라의 충성스런 집사 이름을 따른 것이다. 아틸라는 세 아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는 매우 냉정한 아버지였다. 혈육을 향하는 미소 또한 전혀 없었다. 모두, 아틸라를 주목하고 있었다.

“좀 쉬어야겠다. 에데코.”

아틸라는 이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자신의 막사로 들어가버렸다. 그건 거절이었다. 에데코는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바길리스도 말을 탔다.

“에데코. 테오도시우스에게 전하라고,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직접 와서 무릎 꿇고 기어다녀야 할거라고. 하하하.”

오에스테스는 남루함을 용납지 않는 기상(氣像)으로 소리쳤다.

미사흔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잿빛 사막폭풍 속을 빛줄기 하나만 손목에 감은 채 기어가고 있었다. 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꿈은 아니길 바라며 기어갔다.

“황금검이 나를 부르고 있다. 살려달라고 부르고 있다.”

미사흔의 바닥을 기느라 사막모래에 살이 까이고 손목이 까였다. 잿빛 사막폭풍은 미사흔을 새로이 시작될 느닷없는 역사의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모든 것은 차별없이 황금검을 향해 열려있었다. 황금검 또한 미사흔을 절대 놓지 않았다.

“만났다. 황금검을.”

미사흔은 흥분했다. 미사흔은 소리쳤다. 아, 황금검이 미사흔의 손을 덥석 잡았다. 끈덕진 손이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으리라.”

미사흔은 눈물을 흘렸다. 아직도 눈물은 거듭 모래였다.

“앗.”

순간 사막폭풍은 스스로의 장막을 거두고 있었다. 세상의 희로애락을 안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제 다시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려는 자의 피터지는 자세만 나았다. 해골들의 무덤일 것 같던 천 개의 동굴은 준엄한 눈빛을 가진 느닷없는 역사의 시선이 되어 있었다.

“아니, 너는?”

미사흔은 자신을 스스로 구할 여유도 없었다. 잿빛 사막폭풍의 장막이 거두어지자 달려온 에첼과 오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복호였다. 흉측하게 칼부림 당한 면상으로 미사흔의 손목을 악다구니로 밟고 있었다. 그는 긴 칼을 들어 미사흔의 손등을 가차없이 찔렀다. 전혀 너그러움은 없었다.

“악.”

에첼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미사흔은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미사흔과 황금검을 볼모로 잡은 복호는 본디 불우한 자의 악취를 풍겼다.

“황금검이 내게 올 수 없다면, 황금검을 가진 미사흔을 가지겠다.”

“너의 마음의 길은 구부러져 있구나,”

미사흔의 말은 고통으로 툭툭 끊겼다.

“이 황금검을 놓지않는 너의 마음의 길은 구부러지지 않았단 말이냐?”

야유와 조롱과 욕설이 담긴 날 벼린 칼이었다.

“우리는 신라로 가지 않는다. 너와 다르다. 다르다. 너와 다르다.”

에첼은 이 치욕의 일방성에 치열하게 대들었다.

“더러운 계집.”

복호는 입안에 침을 궤었다.

“내가 더러운 계집이라면 더러운 계집을 겁탈했던 너는 더러운 무엇이냐?”

에첼의 눈빛이 오히려 살기(殺器)였다. 복호는 그 살기를 슬그머니 피했다.

“신라로 돌아가지 않아도 너는 어차피 죽을 것이다.”

복호는 뻘 속에 갇힌 자신의 기진맥진한 왕도(王道)를 구하고자 했다.

찌르렁 찌르렁.


글 소걸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