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보유한 과도한 현금을 풀어 경제 살리기에 나서겠다는 정부 방침을 두고 재계 안팎에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정부는 기업들에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정책을 펴고, 대기업도 현금만 쌓아둘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경제 활력 제고에 동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17일 재계에 따르면 최경환 신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기업 투자를 늘리고 기업 이익의 가계 부문 이전을 목표로 ‘기업 유보금 과세’ 카드를 뽑아들었다. 재계는 여러 논리를 들어 집단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 부총리는 취임 직후 과도한 사내 유보금을 투자로 전환해야 한다며 유보금에 대한 과세 방침을 분명히 했다. 새로 출발한 경제팀이 내수 진작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주요 방법 가운데 하나로 대기업이 쌓아두고 있는 유보금을 타깃으로 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적정유보최고소득에 대한 법인세 과세’를 통해 유사한 세금을 부과한 바 있다. 최근에도 일부 경제학자와 야당을 중심으로 기업투자 독려 차원에서 관련제도를 부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됐었다.
최 부총리는 “우리나라 배당 성향이나 투자를 보면 기업의 사내유보가 과도한 면이 있다”며 “배당이나 성과금 확대 등에 대해 인센티브 제공을 포함해 여러 제도적 장치를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대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한국경제연구원은 이날 ‘사내유보금 과세제도 도입의 문제점과 정책방향’ 보고서를 내고 전면 재검토를 주장했다.
한경연은 사내 유보금 가운데 상당부분은 재투자돼 토지, 건물, 공장, 설비 등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며 기업이 마치 사내유보금을 모두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또 우리 상장기업의 총자산 대비 현금성 자산보유 비율 역시 해외에 비해 낮은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2012년 기준 우리나라 상장기업(금융사 제외)의 총자산 대비 현금성 자산보유 비율은 9.3%로 미국(23.7%), 일본(21.4%), 대만(22.3%), 유럽(14.8%) 등과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김윤경 한경연 부연구위원은 “과거에도 적정유보초과소득과세 제도가 도입됐으나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 폐지됐다. 기업의 현금성 자산 증가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업경영환경의 불확실성 증가에 따른 국제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경제활성화 책임을 기업에만 부과할 것이 아니라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을 개선할 수 있는 정책이 먼저 나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업분석업체 CEO스코어에 따르면 10대 그룹(상장 73개사)의 사내 유보금은 과세가 폐지된 2001년 이후 8배나 늘어 3월 말 기준 480조원에 달한다. 삼성그룹의 사내 유보금이 182조원(1232% 증가)으로 최고다. 현대자동차그룹도 111조6217억원의 사내 유보금을 보유 중이다.
우리나라 경제는 최근 내수침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수출은 사상 최고치를 계속 갈아치우고 있고 국내총생산(GDP)도 꾸준한 상승세다. 반면에 실제 국민들이 체감하는 경제수준은 오히려 나빠졌다는 관측이 많다. 기업들이 현금을 쌓아두면서도 투자와 고용 확대에는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 주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통상 유보금이 많은 기업일수록 재무구조가 탄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반면에 투자나 배당에는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한 기업분석업체 CEO는 “내수와 국민 체감 경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기업 이익이 투자와 고용확대로 이어지고 가계 부문 소득이 늘어야 한다”며 “정부는 산업계가 느끼는 불확실성을 낮춰주는 정책을 펴고, 기업들도 내부 곳간만 채울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투자확대로 경제 살리기에 동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승규기자 seu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