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삼성발 제조업 위기④]뒷전으로 밀려난 제조업

지난해 2월 출범한 박근혜정부는 ‘창조경제’를 새로운 기치로 내걸었다. 창조와 혁신으로 새로운 일자리와 시장을 창출하겠다는 창조경제론은 ‘토목’에 함몰됐던 지난 정부와 차별적인 지향점을 제시하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창조경제는 정부 출범 초기부터 샛길로 빠지기 시작했다. 저마다 창조경제가 무엇인지 묻고 답하느라 정작 본론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창조경제 굴레에 사로잡힌 나머지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주력 제조업은 등한시됐다. 창조와 혁신을 산업 전반에 적용시키겠다는 구상은 말 그대로 구상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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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적어도 지난해 상반기까지 한국 제조업은 삼성전자 스마트폰 의 선전에 도취됐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위기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올해 들어서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한 기업의 일개 사업부가 주춤하는 것뿐인데 그 여파는 제조업 전반으로 퍼졌다. 삼성 한곳만 바라봤던 중소 제조기업들은 연일 비상대책회의를 해야 할 지경이다. 대한민국 제조업 생태계의 취약점이 그대로 노출됐다.

위기가 표면화되기 전 건강한 제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중소기업의 기초 체력을 다져주는 역할을 해야 했던 정부는 제몫을 하지 못했다. 미국과 독일 등 해외 선진국 정부가 제조업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사이 우리 정부 정책에서 제조업은 철지난 유행어 신세가 돼 버렸다.

각 부처는 지난 1년 넘게 오로지 ‘창조경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 급급했다. 전문가들이 정부에 유망 기술 연구개발(R&D) 과제를 제안하면 “‘창조경제’라는 키워드를 넣은 설명 자료를 다시 만들어 오라”는 어처구니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부처 공무원들은 “‘창조경제’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으면 예산을 받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다”며 나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정부가 창조경제가 표방하는 것처럼 혁신 산업에 과감하게 대처한 것도 아니다. 제조업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으로 주목받는 3D 프린팅 산업 발전 정책은 지난 4월에야 뒤늦게 확정됐다. 1~2년 전부터 국내 전문가들이 숱하게 정부 차원의 육성 정책 마련을 강조했지만 정부 대응은 거북이 걸음과 다름없었다.

부처 간 협업에서도 매끄럽지 않은 모습이 반복됐다. 지난 17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확정된 ‘미래성장동력 실행계획’은 추진 초기 미래창조과학부와 산업통상자원부의 각자 노선으로 인해 중복 문제가 지적됐다. 두 부처가 각기 선정한 성장동력 아이템 중 절반가량이 유사하거나 겹쳤다. 뒤늦게 두 부처가 협의해 공동 추진체계를 갖추는 것으로 해결됐다. 애초에 손발을 맞췄으면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준비됐을 사업이다.

국내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는 문제도 정책 차원에서는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삼성전자가 첨단 기술 유출 우려를 무릅쓰고 반도체 공장까지 중국에 짓는 실정이다. 생산라인 해외 이전에 이어 최근 들어서는 R&D센터 해외 구축도 늘어나고 있다.

대기업이 밖으로 나가니 중소 협력사들도 어쩔 수 없이 고객을 따라 해외로 나간다. 해외로 진출하지만 고객은 여전히 한국 기업인 기형적인 해외 사업이다.

해외로 나가는 기업을 정부가 붙잡으려 해도 마땅한 수단이 없다. 기껏해야 1년에 두세 차례 대기업 사장단을 소집해 국내 투자와 고용을 독려하는 게 전부다.

해외 생산라인을 운영 중인 한국 기업의 국내 복귀를 유도하는 유턴 정책도 펼치고 있지만 좀처럼 눈에 띌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유턴 대상 기업이 중소기업 위주인데다 대부분 노동 집약적인 전통 제조업이기 때문이다. 설사 유턴 기업이 늘어나더라도 삼성전자 같은 기업이 한 번 해외로 움직이면 유턴 지표는 한참을 뒷걸음질치는 상황이다. 대기업 제조라인 해외 이전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건강한 제조업 생태계의 전제 조건 중 하나인 대중소기업 공정 거래 환경 조성도 쉽지 않다. 정부가 동반성장 정책에 힘을 싣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갑의 횡포’가 여전하다.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을 만나보면 “제품을 수출하기 전에 국내 대기업 고객에게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한다” “국내 대기업에 제품을 공급한 실적을 대외적으로 홍보하고 싶지만 침묵을 요구 받는다” “월 단위로 단가 인하 압박이 끊이지 않는다” 등 하소연을 쏟아낸다. 겉으로 드러난 위법적 불공정 행위는 많이 줄었지만 규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밑단에서는 그릇된 관행이 반복되고 있다.

대외 평가지표도 나쁜 편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정부 정책 투명성은 개선되는 추세지만 여전히 미국과 일본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지식재산권 보호 기능도 두 나라에 비해 떨어진다.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니 기업의 불만은 갈수록 커진다. “창조경제에 제조업은 없다”는 극단적인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한 중소 제조기업 관계자는 “치열한 시장 경쟁을 극복하는 것은 기업의 몫이지만 최소한 공정한 플레이가 펼쳐지는 환경은 정부가 마련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부의 선제적인 제조업 육성 노력이 부족하다”며 “창조경제라는 구호만 외칠 게 아니라 국내 산업 전반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큰 틀의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장균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해외 선진국의 제조기술 선진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정부도 기존 정책을 재검토해 제조업 업그레이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며 “단순히 제품 기술뿐 아니라 차세대 제조 시스템을 확보하는 국가 차원의 R&D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 제조업 발전 흐름에 비춰보면 갈수록 단일 부처가 감당하기 어려운 광범위하고 복잡한 신기술이 늘어날 전망”이라며 “범부처 차원에서 국가 프로젝트 관리부터 규제 해소, 기술 보호, 신기술 개발 등을 촉진할 수 있는 운영 방안을 갖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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