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열강으로부터 오랜 기간 식민 통치를 받은 탓에 필리핀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이고 수동적인 성향이 무척 강하다. 스페인은 300년에 이르는 식민 통치 기간 중 많은 필리핀 지식인들을 학살했다. 리더의 자질이 있고, 똑똑해 보이는 사람은 독립 운동에 투신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필리핀에 나가있는 한국인 주재원들은 “필리핀 직원들이 시키는 것은 잘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굉장히 꺼린다”며 “공공 부문의 부정부패 문제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것 같다”고 말한다.
몇몇 가문이 필리핀 대부분의 부를 차지하고 있고, 공공 부문의 부패도 심각하다. 치안이 불안해 작은 상점 앞에도 총을 든 보안 요원이 지키고 있을 정도다. 필리핀은 공식적으로 총기 규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부정부패가 심각해 군인·경찰들이 총기 매매에 나서기도 한다.
현지에서 만난 필리핀 대학생 디에고 산토스 씨는 “노력해도 신분 상승에 한계가 있다 보니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우리끼리 `필리핀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순해 보이는 필리핀 사람들도 화가 나면 무섭게 변한다. 필리핀에서 오래 일한 주재원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부하 직원을 혼내는 등 모욕감을 주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필리핀에서 15년째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는 전우익 아이엠필리핀 차장은 “예전에 한국 기업 중간 관리자가 필리핀 작업자를 혼내면서 얼굴에 낙서하고 모욕감을 준 적이 있다”며 “그 분이 퇴근길에 총에 맞아 교민 사회가 들썩였다”고 말했다.
그는 “필리핀은 범죄 검거율이 20% 수준에 불과하다”며 “7000여개의 달하는 섬으로 이뤄진 나라인데 잠적하면 무슨 수로 찾겠나”라고 말했다. 현지인과 되도록이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지적이다.
버는 만큼 바로 소비하는 것도 필리핀인의 특성이다. 필리핀은 민간 소비가 국내총생산(GDP)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소비 활동이 왕성한 나라다. 빈곤층이 많은데도 고급 쇼핑몰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중소 도시에도 쇼핑몰이 넘쳐난다. 다소 기형적인 소비 중심의 경제 구조를 떠받치는 게 바로 해외 노동자들이 송금하는 돈이다. 해외 근로자의 송금액은 필리핀 GDP의 14%를 차지한다. 해외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수는 1000만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소득층을 타깃으로 특정 수요를 공략한다면 필리핀도 우리 수출 시장의 한 축이 될 수 있다”며 “아세안 역내 무역을 적극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라구나(필리핀)=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