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이 마침내 업의 속성에 걸맞게 소재 전문기업으로 탈바꿈하는 승부수를 던지면서 삼성 그룹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된다. 소재 산업은 삼성이 라이벌인 LG에 뒤처진 유일한 업종이자 국내 제조업의 병목이기도 하다. 제일모직을 놓고 그동안 안팎에서 사명 변경 및 사업 분리 목소리가 컸던 이유다. 특히 삼성전자와 함께 이건희 회장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계열사라는 점에서 이번 조치는 LG화학에 버금가는 소재 전문 회사를 만들겠다는 전향적인 의지로 풀이된다.
관전 포인트는 크게 세 가지다. 제일모직을 중심으로 한 삼성 그룹 내 소재 사업 계열사 위상과 구도 변화가 우선이다. 삼성이 소재 사업을 키우는 배경이 두 번째다. 세계 일류 제조업의 반열에 오른 삼성이 마지막 종착점인 소재 사업을 어떻게 육성할지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삼성과 제일모직의 행보는
제일모직이 패션사업을 양도한 것은 소재사업에 투자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제일모직은 연결기준 매출 6조99억원 중 4조2328억원을 소재(케미칼·전자재료)사업에서 올렸다. 합작사인 삼성코닝정밀소재를 제외하면 삼성 그룹 소재 사업의 외형은 LG화학 단일 회사 매출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규모의 경제를 감안하면 삼성이 단기간 내 글로벌 소재 기업을 만들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최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소재 원천기술 기업인 노발레드를 인수했지만 매출 확대 효과보다는 특허 방어의 목적이 크다. 이번 양도 대금 1조여원을 또 다른 유력 사업을 인수하는 데 투입할 것으로 관측되는 이유다. 해외 소재 기업 외에도 그룹 내 계열사 인수 합병이 유력한 시나리오로 거론된다.
그룹 내부에서는 전자소재연구소가 구조 재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삼성SDI·제일모직·삼성정밀화학·삼성코닝정밀소재 5개 계열사의 핵심 연구 인력이 전자재료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전자소재연구소는 삼성종합기술원과는 달리 조기 사업화로 연결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제일모직이 전자재료연구소의 주축을 맡게 되면 그룹 내 위상은 더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따라 외부 영입 인사인 백이현 제일모직 부사장의 역할론이 주목된다. 박종우 사장이 제일모직을 진두지휘하는 한편, 전자소재연구소를 백 부사장이 이끄는 그림이다.
지난 59년간 유지해온 제일모직의 사명 변경도 관심사다. 주력 사업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고집했던 이유는 이건희 회장의 애착이 남달리 커서였다. 하지만 패션을 분리하면서 조만간 사명 변경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룹 안팎에서는 삼성첨단소재와 삼성머티리얼즈가 거론된다. 이에 대해 제일모직은 “아직 사명 변경을 검토한 바 없다”고 말했다.
◇왜 소재인가
삼성은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제조업이 주축이다. 이제 제조업에서 소재 사업의 혁신 없이는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완제품과 부품 위주인 삼성 그룹 내에서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배경이다.
치열한 자존심 경쟁을 펼치고 있는 LG그룹의 LG화학이 성장해왔던 과정도 이번 결정을 자극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LG는 일찌감치 소재 사업을 그룹 차원에서 키워왔다. LG화학은 2007년 LG석유화학을 합병하면서 급속하게 덩치를 키워나가 추가 투자 여력을 마련했다. LCD·OLED 소재 등 그룹 내 `캡티브 마켓`을 활용함으로써 기술 경쟁력을 조기에 확보할 수 있었다.
첨단 소재 산업의 부가가치가 갈수록 높아지는 것도 삼성이 주목하는 대목이다. 글로벌 기업들이 제조업에서 보기 힘든 수치의 영업이익률을 자랑한다. 삼성이 모델로 삼고 있는 독일 화학회사 머크만 해도 이익률 27%가 넘는다.
◇이서현 부사장 역할론은?
변화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 이건희 회장의 딸인 제일모직 이서현 부사장이다. 패션 사업 양도 이후 이 부사장이 어떤 지위를 맡을지는 그룹 후계 구도와 맞물려 초미의 관심사다. 이 부사장의 현 직함은 경영기획담당 부사장이다. 패션 사업을 전담해왔던 이 부사장은 지난 4월 OLED 소재 사업 출하식에 직접 참여하면서 소재 사업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룹 차원에서 소재 사업에 힘을 싣게 되면 이 부사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패션 사업을 양도함으로써 삼성에버랜드에 대한 이 부사장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패션 사업은 현 윤주화 사장이 삼성에버랜드로 자리를 옮겨 맡을 것으로 보인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