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생활가전업체 A사는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에 인증을 의뢰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해당 기관 인력부족으로 처리가 지연돼 납기일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 A사 관계자는 “자칫 계약이 취소될 뻔 했다”며 “가격 횡포가 심하지만 업무처리가 확실한 외국계 인증업체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 KTL은 업무 지연으로 인한 민원이 잦아지자 기획재정부에 내년 정규직 119명 증원을 요청했다. 출연이 아닌 자체 사업비로 인건비를 충당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정부 예산 부담을 줄이면서 일자리 창출에 부응하고, 중소기업 애로도 해소하려는 차원이었다. 기재부로부터 돌아온 답은 16명. 거듭 요청하자 26명까지 늘어났고, 현재 기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추가 논의 중이다.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막고, 중소기업 애로 해소를 방해하는 모순된 상황이 빚어졌다. 한쪽에서는 공공기관의 업무처리 지연으로 사업 차질을 빚는다는 중소기업 민원이 폭주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공공기관이 인력을 늘려 기업 애로를 해소하려 해도 정부 방침에 가로막히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KTL은 산업기술혁신촉진법에 따라 설립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연간 1만2000여개 기업에 9만여건 시험인증 서비스를 제공한다. 올해 예산 1303억원 중 정부 출연금은 48억원에 불과해 재정자립도가 96.3%다.
얼핏 우량 기관으로 보이지만 기업고객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2010~2012년 KTL의 국내 시험인증 처리건수는 80% 증가했지만 6년간 정원은 동결됐다.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만 대폭 늘리다보니 업무 지속성과 연계성이 떨어졌다. 결국 업무 지연과 부실을 초래했다.
피해는 값비싼 해외 인증업체를 피하려 공공기관을 찾는 중소기업에 돌아갔다. 반복되는 인증 지연 때문에 고객이 아닌 인증기관 일정에 맞춰 사업을 해야 할 판이다.
산업조명업체 B사 관계자는 “최근 KTL로 방폭 인증 업무가 몰려 평소보다 2~4개월 늦는 것을 감안하고 사업을 한다”고 전했다. 승강기업체 C사는 KTL 업무접수가 힘들어 저가의 민간 중소업체를 찾았다가 이후 해당 업체가 폐업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KTL이 자유롭게 정원을 늘리지 못하는 것은 정부 출연 예산을 받는 공공기관이기 때문이다. 재정자립도와 관계없이 법에 따라 출연금을 받는 이상 KTL이 요구하는 수준의 증원은 어렵다는 게 기재부의 설명이다. 공공기관은 일자리 창출 시책에 부응하려 해도 `정도껏` 해야 하는 실정이다.
정부의 지방 이전 정책이 역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KTL 인력 증원을 제한하는 이유 중 하나로 내년 말 KTL의 진주 이전을 꼽았다. “민간 기업을 상대하는 기관이 지방으로 이전하면 영업상 불확실성이 발생한다는 이유”에서다. 정부 방침에 따른 지방 이전이 같은 정부 한쪽에서는 리스크 요인으로 평가받는 모순된 구조다.
공공기관 관계자는 “각 부처 정책이 칸막이 형태로 돼있다 보니 다양한 기관의 속성을 반영해 유연하게 움직이기 힘든 구조”라며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 측면의 정책 조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