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40>LG, 반도체 손떼다

`징글벨~, 징글벨~.`

크리스마스 캐럴이 도심 거리에 울려 퍼지던 1998년 12월 24일.

반도체 통합법인 경영주체 선정을 위한 평가기관인 아서디리틀(ADL)은 이날 현대가 경영주체로 적합하다는 평가 보고서를 발표했다.

Photo Image
강유식 LG구조조정본부장이 1999년 1월 6일 서울 여의도 트윈타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LG반도체의 모든 지분을 현대전자에 양도키로 전격 결정했다`는 LG그룹의 반도체 빅딜결정내용을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정태수 ADL 한국지사장(현 파리크라상 대표)은 “우리가 설정한 광범위한 분야에서 현대전자가 일관된 우위를 보여 통합회사의 경영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이번 평가는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진행했다”고 말했다.

ADL은 통합회사의 경영주체가 확정되려면 양사 간에 경영권을 상대방에 넘기는 형태의 합병 합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ADL의 평가항목은 모두 15개로 이 중 현대 측 우세 8개, 나머지 7개 항목은 대등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ADL 측은 이 평가작업에 3개 대륙 9개 사무소에서 선발된 20여명의 컨설턴트가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정태수 당시 지사장의 회고.

“20여명 중 한국인은 저와 재무분석팀의 이장석 씨(현 넥센 히어로즈 대표) 외에는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외국인 전문가였습니다. 국내에는 반도체 전문가가 없었습니다. 그런 만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를 했다고 확신합니다.”

15개 평가항목은 △연구개발력(설계능력) △연구개발력(공정기술) △메모리 응용기술 △지식재산권 △제품 포트폴리오 △마케팅과 영업력(예측능력) △마케팅과 영업력(고객자원) △생산성 △생산설비의 효율성 △자금 확보력 △자금 활용 능력 △자본 수익성 △재무 건전성 △인적자원 확보 △인적자원 관리능력이었다.

ADL은 최종 평가보고서를 청와대와 산자부, 금융감독위원회, 전경련, LG와 현대 6곳에만 밀봉해 배포했다. 그러나 LG 측은 평가보고서 수령을 거부했다.

정태수 당시 지사장의 계속된 증언.

“LG로 보낸 보고서는 되돌아왔어요. 수령을 거부한 거죠. 당시 평가보고서 한 부가 미국 본사에 보관돼 있습니다. 당시 작업했던 메모를 비롯해 모든 자료가 다 들어 있습니다.”

평가보고서가 발표되자 희비가 엇갈린 현대와 LG 측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현대 측은 “이번 평가결과는 종합적이고 객관적이었다”며 “앞으로 구체적인 통합방안과 절차를 조속한 시일 내에 확정해 공표하겠다”고 밝혔다.

반면에 LG 측은 이 발표에 강력 반발했다.

LG반도체는 구본준 사장 명의로 성명을 내고 “평가기준과 방법에 대한 사전합의 없이 독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며 `수용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LG반도체는 발표문에서 “ADL 보고서는 평가기준 및 방법에 대한 사전합의와 실사·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관련 당사자 일방을 배제한 채 독단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의견제시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LG반도체는 “ADL 보고서를 접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며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LG반도체는 이어 12월 26일 ADL의 평가보고서에 대한 반박 보고서를 발표했다.

LG는 반박 보고서에서 ADL의 15가지 평가항목 중 재무건전성과 연구개발력 등 10개 항목에서 자신이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나머지 지식재산권 등 5가지 항목은 양사가 대등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LG반도체의 반박 보고서 내용은 현대전자가 8개 항목에서 우세하다는 ADL의 주장을 정면 반박하는 것이다.

그해 12월 27일.

구본준 LG반도체 사장(현 LG전자 부회장)은 이날 오후 서울 영동 사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ADL이 사용한 자료와 판단근거에 공개적인 검증과정을 거칠 것을 요구하고 LG반도체가 입은 물질적, 정신적 피해에 대해 ADL을 제소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구 사장은 현재 진행 중인 소장 작성 등 실무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다음 달 미국 보스턴 ADL 본사를 상대로 불법행위법이나 계약법에 의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설명했다.

구 사장은 ADL은 경영주체 선정을 위한 평가는 공정성과 객관성, 전문성을 요구하는 작업인데도 ADL은 이 중 어느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보고서를 냈으므로 귀책사유는 ADL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태수 ADL 한국지사장은 12월 29일 오전 기자들에게 반도체 통합과 관련해 “ADL이 내놓았던 평가보고서는 공정성과 도덕성, 전문성을 갖춘 것으로 별도의 검증이 필요없다”고 말했다. 정 지사장은 “LG반도체로부터 원했던 만큼의 충분한 자료를 건네받지는 않았으나 회의에서의 질의답변 등을 통해 많은 자료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며 “결론을 내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다.

정태수 당시 지사장의 회고.

“5대 그룹의 빅딜은 김대중정부가 정권의 사활을 걸고 추진한 일입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구조조정인데 그런 일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만일 ADL이 그렇게 할 자신과 능력이 없었다면 이 일을 맡지도 않았을 겁니다. 국가경제에 미칠 파급을 감안해 한마디로 목숨 걸고 결론을 내린 일입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일은 평가작업을 하는 기간 내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어느 곳에서도 평가와 관련한 전화 한 통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했어요.”

평가보고서 내용을 놓고 언론을 통한 양측의 논쟁이 계속되자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경제부총리 역임, 현 코레이 고문)이 총대를 메고 해결사로 나섰다. 더는 논쟁을 방치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회고록 `위기를 쏘다`에서 밝힌 내용이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 30일.

이 위원장은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서울 플라자호텔 일식집에서 독대했다. 이 위원장은 구 회장과 사적인 만남이 처음이었다. 이 위원장은 29일 구 회장에게 전화를 해 `한잔 하십시다`며 일정을 잡았다.

술이 한 순배 돌자 이 위원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구 회장님,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습니다. 게임을 크게 하세요. 크게 놓고 보시면 얻으실 겁니다.”

“허허 무슨 말씀입니까.”

“연초까지는 마음정리를 하셔야지요. 윗분을 한번 만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허허 글쎄요.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의논해 보겠습니다.”

이 위원장이 지칭한 윗분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마음정리를 하라는 말은 반도체를 포기할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새해를 맞은 1999년 1월 4일.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오후 4시 서울 롯데호텔에서 구본무 LG, 정몽헌 현대 회장(작고)과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서강대 총장 역임, 현 숙명학원 이사장, 삼성꿈장학재단 이사장), 양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 5명이 만나 반도체 빅딜 원칙에 변함이 없다고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그해 1월 6일 청와대 집무실 옆 접견실.

김대중 대통령과 구본무 LG 회장이 만났다. 구 회장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가 대통령 면담을 신청해 마련한 자리였다. 배석자는 강봉균 경제수석(정통부 장관, 재정경제부 장관 역임, 현 군산대 석좌교수) 혼자였다. 구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반도체는 선친이 물려주신 사업입니다. 기술력과 재무구조도 우수합니다.”

김 대통령은 말이 없었다. 표정도 굳어 있었다. 구 회장은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모든 걸 내려놓기로 했다.

“아쉽지만 국가경제를 위해 내어놓겠습니다. 이왕 포기하는 것 지분 100%를 모두 현대에 넘기겠습니다.”

김 대통령이 반색했다.

“큰 결단을 내려줘 고맙습니다. 정부가 도울 일이 있으면 적극 돕겠습니다.”

강봉균 경제수석의 증언.

“구 회장은 이미 정부 결정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청와대로 왔어요. 비감한 심경을 토로하면서 정부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어요. 김 대통령이 그를 위로했습니다. 면담 시간은 30분 정도였습니다.”

일설에는 김 대통령이 구 회장에게 “구 회장 날 좀 도와주소”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LG그룹은 이렇게 반도체 사업을 타의에 의해 포기했다. 반도체 빅딜의 구체적인 절차와 가격 협상이 남아 있었지만 빅딜은 이날로 일단락됐다.

LG그룹의 고위인사 L씨는 반도체 빅딜과 관련,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며 당시 일에 관해 언급을 극히 자제했다. 이 인사는 사견(私見)을 전제로 “반도체 빅딜은 편파적이었다. LG가 반도체 사업을 현대에 넘기게 된 배경에는 현대의 대북사업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반도체 사업을 지키지 못한 구본무 회장은 한동안 상심(傷心)의 날을 보냈다고 한다.

정부의 빅딜에 관해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은 회고록에서 “정부 주도의 빅딜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 간 거래는 기업에 맡겨야 한다. 정부가 나서면 뒤틀리고 어긋나게 된다”면서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착잡하다”고 했다.

그해 4월 22일 LG와 현대는 서울 신라호텔에서 협상 타결을 발표했다.

현대로 통합한 반도체 사업은 가격 폭락으로 인해 한때 경영난에 빠졌다. 이후 2001년 하이닉스로 사명을 변경했고, 2012년 2월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SK는 그해 3월에 사명을 SK하이닉스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도체기업의 흥망사에는 이 같은 곡절이 숨어 있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