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37>국민이 지킨 한글<2>

1998년 6월 22일 오전 서울 르네상스호텔.

이민화 한국벤처기업협회장(메디슨 대표이사, 기업호민관 역임, 현 KAIST 교수)은 기자회견을 열고 한글학회를 비롯해 15개 사회단체와 함께 `한글 지키기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고 밝혔다. 이 운동 업무를 총괄하는 본부장은 이 회장이 맡았다. 이 회장은 이찬진 사장(국회의원 역임, 현 드림위즈 대표)의 백의종군을 전제로 한글 사용자를 중심으로 국민주 운동을 벌여 나가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 회장은 “외국 공공기관의 SW 구입비는 HW 구입비의 160%인 데 비해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SW 구입비는 10%에 불과하다”며 “정부는 올해 예산에 반영된 SW 구입비를 즉시 집행하라”고 주장했다.

벤처협회가 한글 지키기 운동을 주도하자 창구는 운동본부로 단일화됐다.

서울 용산전자단지 상점가진흥조합, 한국대학생 벤처창업연구회, 사단법인 한국청소년학회와 PC통신에서 한글 살리기 서명운동을 벌이던 `한글 사랑회` 등이 운동본부에 가세했다.

이종훈 비트정보기술 사장도 그동안 독자 추진하던 모금운동을 정리하고 운동본부에 참여했다. 이 사장은 6월 18일 한 일간지에 광고를 냈다. 그는 `대국민 호소문`에서 `회사가 어렵다고 한글을 MS에 팔면 나라가 어렵다고 독도를 일본에 팔까?`라는 부제를 달았다. 국민의 정서를 자극하는 부제였다. 이 광고는 당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민화 회장의 말.

“허웅 한글학회 이사장(작고, 서울대 교수 역임)을 만나 운동의 취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평생 우리말과 글을 다듬고 지켜온 허 이사장은 적극 동참의사를 밝혔습니다.”

이런 국민운동에 정보통신부는 MS의 한글과컴퓨터 투자는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당시 IMF 위기 상황에서 외자 유치는 시급한 현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자 유치를 국민이 반대하니 정부로서는 난감했다.

그해 6월 중순 어느 날.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현 S&T중공업 회장)이 이민화 회장을 장관실로 불렀다.

배 장관의 말.

“나는 한컴 경영난은 시장원리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민화 회장은 당시 이 운동을 독립운동하듯 했어요. 그는 `정부와 공공기관이 정품 SW를 구입해 달라`고 했어요. 나는 예산 문제도 있고 정부가 특정 제품을 억지로 살 수는 없다고 거절했어요.”

이민화 회장의 증언.

“배 장관에게 혼났습니다. 한글 살리기 운동을 만류하셨어요.”

조현정 당시 부회장(현 한국SW산업협회장, 비트컴퓨터 회장)의 말.

“배 장관께서 외국 돈은 안 되고 국내 돈은 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해 6월 24일.

한광옥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청와대 비서실장 역임, 현 통일미래연구원 이사장)는 당사에서 열린 당무위원회의에서 “한글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만큼 당 차원에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민회의는 당정협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당정협의에 참석했던 안병엽 정통부 차관(정통부 장관 역임, 현 KAIST 석좌교수)의 회고.

“국민회의 측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더군요. 한글을 살리도록 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남궁석 삼성SDS 사장(작고, 정통부 장관, 국회 사무총장 역임)에게 한컴 인수를 타진했는데 관심이 없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해 7월 1일.

이민화 회장은 “한글을 포기하면 1조원대의 국가손실을 가져 온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발표문 초안을 직접 작성했다.

첫째, 한글 사용자 400만명의 재교육비로 4000억원을 계상했다. 여기에는 강사료나 교육비는 포함하지 않았다. 둘째, 10억원에 달하는 정부 공공문서를 MS워드로 전환하는 비용으로 1000억원이 든다는 것이다. 셋째, 신규 워드 프로그램을 구입하기 위한 비용이 5000억원이 든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1조원 국부 손실액의 산출 근거였다.

그해 7월 6일 오전 10시 르네상스호텔.

한글 지키기 운동본부는 기자회견을 열어 한컴을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민화 회장은 “한컴은 MS와 투자유치 협상을 중단하고 운동본부가 제시하는 인수조건을 수용, 한글 살리기에 동참하라”고 공개 제의했다.

운동본부는 인수조건으로 주당 5000원에 신주인수 또는 전환사채 형태로 100억원을 투자하고 현재 한컴이 안고 있는 채무보증을 3개월 안에 해소하며, 긴급자금은 즉각 대여해주겠다고 밝혔다. 또 현 경영진은 현 상황을 책임지고 백의종군해야 하며 새로운 사장은 공개모집을 거쳐 채용하겠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컴의 주식가치는 3000~4000원 수준이었다. 주당 5000원에 산 사람은 그 자리에서 1000~2000원을 손해 보는 상황이었다.

이민화 회장은 회견에 앞서 이찬진 사장을 만나 MS의 한컴 투자 철회를 설득했다.

이민화 회장의 말.

“이 사장에게 최소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었어요. 100억원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돈을 우리가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대신 MS 투자 유치를 중단하라고 설득했습니다.”

조현정 당시 부회장의 회고.

“이 사장은 MS와 계약 당사자였습니다. 법적인 문제도 생각했을 겁니다. 또 MS가 투자를 하면 한컴의 경영권은 보장됐습니다. 그러니 쉽게 경영 포기를 확답하기가 어려웠어요.”

이민화 회장은 조현정 부회장과 함께 김재민 한국MS 사장도 만났다. 이 회장은 김 사장과 친분이 없었다. 김 사장을 잘 아는 조 부회장이 자리를 마련했다. 두 사람은 김 사장에게 한컴 인수 포기를 설득했다.

조현정 부회장의 말.

“김 사장과 두 번 만났어요. 어떤 경우라도 법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그해 7월 10일 오후.

김대중 대통령은 부처별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컴퓨터 SW 불법복제는 관련법을 고쳐서라도 벌금을 많이 내도록 해야 한다”며 “불법복제 차단을 위한 법 개정을 추진하라”고 배순훈 정통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김 대통령은 “한컴의 경영부실로 인해 한글 개발과 공급이 차질을 빚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토록 하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한 배 장관의 증언.

“대통령께서 `한글이 없어진다니 이거 곤란하지 않느냐`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이 일은 시장에 맡겨야 합니다. 주위에서 뭐라고 하면 배 장관에게 물어보라고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렸어요.”

그해 7월 20일 10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이찬진 한컴 사장과 이민화 한글 지키기 운동본부장은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한컴이 운동본부의 100억원 규모 투자 제의를 받아들여 한글 사업을 계속하기로 합의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찬진 사장이 용단을 내려 생각을 바꾼 것이다.

양측은 합의서를 통해 한컴은 △MS와 투자유치 협상을 중단하고 △운동본부로부터 100억원 투자를 유치하며 △운동본부와 공동으로 SW 정품 사용운동 및 100만 회원가입 운동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찬진 사장은 “국민의 한글에 대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범국민적인 운동에 부담을 갖고 있던 중 한글 지키기 운동본부의 제안을 수용하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민화 회장은 “이번 한컴의 결정은 400만 한글 사용자의 소비자 주권의식에 기초한 공정거래질서 회복이자 한글 퇴출에 따른 1조원 국부의 누출 방지며 한국 SW 발전의 초석을 위한 결의”라고 강조했다.

한컴은 이 회견에 앞서 MS 측에 투자 요청 철회를 통보했다.

이찬진 사장의 증언.

“한컴의 투자 요청 철회에 MS의 법적 문제 제기는 없었습니다. 하고 싶어도 당시 분위기상 MS가 한컴에 법적인 문제를 제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한글 살리기 운동의 높은 열기에 비해 성금액은 기대 이하였다.

이민화 회장의 말.

“민간 모금액은 7억원에 불과했습니다. 조현정 부회장과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가 5억원과 3억원을 투자해 15억원이 전부였습니다. 여기저기서 5억원을 더 모았어요. 나머지는 긴급 소집한 메디슨 이사회에서 50억원을 한컴에 투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메디슨이 비의료기업에 유일하게 투자한 일입니다. 모두 70억원을 모금했습니다.”

한컴 새 사장은 약속한 대로 공모했다. 그해 7월 24일까지 모두 30명이 공모에 참여했다.

최종 2명을 선발해 7월 26일 최종 면접을 실시했다. 전하진 지오이월드 사장(현 국회의원)과 이유재씨(게임네트 대표 역임)였다. 심사위원은 이민화 회장을 비롯해 조현정, 변대규, 장홍순, 이찬진씨가 맡았다. 이찬진 사장은 심사에 불참했다. 심사위원들은 27일 새벽까지 두 사람을 상대로 한컴 회생 방안과 미래 비전을 물었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그해 7월 27일.

새 사장으로 전하진씨를 선임했다. 경쟁했던 이유재씨는 한컴 사외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다.

한컴은 전 사장을 중심으로 향후 제품 개발계획과 100만 회원 유치운동 등 마케팅 전략을 구체화하고 본격적인 제2의 신화창조에 도전했다. 노력 끝에 한컴은 살아났다.

한컴은 전하진 사장에 이어 최승돈 직무대행, 김근, 류한웅, 백종진, 김수진, 김영익을 거쳐 2010년부터 이흥구 사장체제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컴은 지난해 659억원의 매출과 241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한컴 사태는 벤처인에게 `한 우물을 파라`는 점과 잘나갈 때 위기를 생각하라는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세월이 물처럼 흘렀지만 벤처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컴의 아픈 추억이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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